한국일보

"부시, 북한주민 동정심 실천 옮겨야"

2002-05-16 (목)
크게 작게

▶ 커멘터리21

지난 3월 25명이 베이징 주재 스페인 대사관으로 뛰어들면서 부각되기 시작한 탈북자 문제가 베이징은 물론 심양까지 무대가 확대되면서 다시 국제적인 조명을 받고 있다. 탈북자 문제의 파장과 향후 전망 등을 살펴본다.
<민경훈 편집위원>

베이징과 심양의 캐나다 대사관, 미국과 일본 총 영사관에서 동서 다발적으로 일어난 탈북자 진입 사건은 여러 나라를 골치 아프게 만들고 있다.
이번 사건으로 비난의 화살을 가장 많이 받고 있는 나라는 일본이다. 일본 영토인 일본 영사관 내 중국 관원이 들어갔다는 이유로 외교 분쟁이 일어나는가 싶더니 나중에 일본 영사관 측이 ‘탈북자 끌어내기’를 용인한 것이 밝혀지면서 일본 외교의 옹졸함을 만천하에 드러낸 계기가 됐다. 일본 내부에서까지 외상의 경질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다.

난처한 입장에 서게 된 것은 일본만은 아니다. 가장 급한 것은 중국이다. 중국은 전통적인 혈맹인 북한과 중국으로 넘어온 탈북자를 송환한다는 조약을 맺고 있다. 그러나 다른 나라 영토인 중국 내 대사관과 영사관에 진입한 탈북자를 북한으로 돌려보낼 경우 인도주의를 무시하는 국가라는 비난은 물론 간신히 따 낸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의 성공적인 개최에 지장을 줄 수도 있다.


중국 측이 지금까지 북한과 접경 지역 탈북자의 단속을 강화하면서도 일단 외국 공관에 진입한 탈북자는 북한으로 송환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세운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일이 계속될 경우 탈북자들의 한국 행 경유지로 굳어질까 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미국도 마찬가지다. 일본, 미국 등 북한과 이해관계가 밀접한 나라 영사관을 택한 탈북자들이 종전과는 달리 한국이 아닌 미국을 정착 희망지로 밝혔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은 그 동안 "북한 주민의 참상에 동정을 금할 수 없다"며 북한 주민들에 관심을 보여왔다. 이들의 요구를 거부할 경우 미국은 ‘위선자’라는 오명을, 받아들일 경우 수많은 탈북 난민을 수용해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 것이다.

미국은 중국에 거주하고 있는 수십 만 명의 탈북자들이 경제 난민인가 정치 난민인가를 결정해야 할 어려운 선택을 강요받고 있다. 미국은 과거 정치 난민을 받아들이는 것이 종래의 입장이었다. 유엔의 난민고등판무관이 탈북자중 상당수가 정치적 난민이라고 밝혔음에도 이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를 인정할 경우 탈북자들의 미국 행을 막을 명분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될 경우 중국 또한 이들을 북한으로 돌려보낼 수 없게 된다. 중국은 이를 막기 위해 유엔 조사단의 탈북자 면담마저 허용하지 않고 있다. 미국이 탈북자들의 정치 망명을 허용한다면 중국과의 관계가 불편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막 시작되려는 북한과의 대화 재개도 물 건너가기가 쉽다.

통상 하루 정도면 마무리되던 외국 공관 진입 탈북자들의 뒤처리를 3일씩 끈 것은 미국이 이 문제 처리를 놓고 고심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베이징의 한 미국 관리는 "이들이 미국 행을 고집하는 바람에 그러지 않아도 복잡한 문제가 더 복잡해졌다"고 말했다.

과거 외국 공관에 진입한 탈북자들과는 달리 심양의 미국과 일본 영사관에 진입한 이들이 왜 미국 행을 고집했는가도 짚어볼 대목이다. 일본 영사관에 들어간 탈북자들도 원래는 미국 영사관을 희망했었다. 단지 일행 중 어린 아이와 임산부가 있어 담이 높은 미국 영사관 진입이 어렵다고 판단, 일본 쪽을 택한 것이다.

미국과 일본 영사관에 뛰어든 탈북자들은 왜 미국 행을 원했을까. 1997년 이들 가족 중 한 명이 반정부 발언 혐의로 체포돼 실종된 후 이들 일가족은 숱한 박해를 받아왔다. 갖은 고생 끝에 중국으로 넘어왔지만 작년 다른 가족 5명이 베이징의 유엔 사무실을 통해 한국으로 넘어온 후 북한의 실상을 고발하는 책을 펴내자 북한은 수색대를 중국까지 파견, 이들을 추적하는 등 이들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는 것이다.


이들이 지니고 있던 편지에는 그들이 한국에 갈 경우 한국 내 북한 공작원에 의해 살해될 가능성이 있다고 적혀 있다. 탈북자들은 일단 한국에 오면 마음대로 활동하는 데도 제약을 받는다. 이들이 너무 설쳐댈 경우 남북 화해 무드가 깨진다는 이유로 정부의 규제를 받기 때문이다.

지난 3월 베이징의 스페인 대사관을 통해 한국에 온 일행 25명도 공항에서 사진 촬영과 형식적인 질문 5가지만 받고는 대기소로 옮겨져 언론과의 접촉이 두절된 상태다. 안기부가 이를 허용치 않기 때문이다. "이들이 간첩일지 모르기 때문에"라는 것이 안기부 입장이지만 여행객을 가장 해 얼마든지 손쉽게 들어올 수 있는 한국을 북한 간첩이 그 고생을 해가며 들어왔으리라고는 믿기 어렵다. 타임지는 이 사건을 보도하며 "자유의 나라에 찾아 온 이들의 입을 막지 말라"고 꼬집기도 했다.

이들은 또 먼 친척이 미국에 있다며 미국에서 북한의 실상을 알리는 작업을 하고 싶다고도 밝혔다. 탈북자들은 현재 세계의 미아이다. 목숨을 걸고 뛰어든 탈북자들을 중국 관원으로 하여금 끌어가게 한 일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말로는 탈북자의 인권을 옹호하는 척 하면서도 입국을 불허한 미국이나 가까스로 이들을 받아들이고도 북한의 눈치를 보며 자유를 제한하는 한국 정부 떳떳할 수 없다.

굶주리지 않고 억압받지 않으며 살고 싶은 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소망이다. 한국 정부의 냉대와 미국의 입국 거부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찾는 탈북자들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정치적 경제적 자유를 찾아 북한을 떠난 이들을 어떻게 대접하느냐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어느 정도의 인간인가를 재는 척도다.

이들을 대하는 한국과 중국, 일본과 미국의 태도는 실망스럽기 짝이 없다. 한국(길수 가족 구명 운동본부)과 미국(한반도 평화 프로젝트, 213-804-2212, 381-7172)에서 일고 있는 부시 대통령에게 탈북자들의 미국 망명 허용을 촉구하는 탄원 움직임에 작은 힘을 보태는 것이 미주 한인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성의 표시라고 생각한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