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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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과 지미 카터

2002-05-07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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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서울에선

▶ 안영모(언론인)

한국의 정치 상황은 20여년 전 미국의 정치 환경과 많은 점에서 유사하다. 노무현이라는 "무명의 정치인"이 대선 가도에 등장한 것도 그 유사성의 한 부분이다.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나 정규 교육이라고는 겨우 고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노무현은 말하자면 "한국판 이단아"인 셈이다. 민주당 지명전에서 그가 상대한 후보들은 하나같이 명문대학을 나왔고 정치경력도 화려한 내로라 하는 인물들이었다.

특히 이인제로 치자면 대선 후보 경력에다 동교동 구파의 절대 후원을 받던, ‘지명 1 순위’이었다. 하지만 노무현에게 여지없이 나가 떨어졌다. 그렇게 된 데는 이른바 "노풍" 때문만은 아니다. 당내 경선(지명전)은 ‘바람’만 가지고는 안 된다. 확실한 조직 표가 움직여야 가능하다. 이러니 저러니 민주당 내 최대 주주인 DJ가 고개를 끄덕이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이인제의 "청와대 음모론"도 그래서 나왔다.

한편 지난 76년, 워싱턴 정가에 지미 카터라는 무명의 ‘이단아’가 등장한 것은 천지개벽할 일이었다. 저 남쪽 조지아라는 작은 주에서 입신한 뒤, 민주당 내의 기라성 같은 거물들을 차례로 쓰러뜨리기 전만 해도, 같은 민주당 소속 거물 정치인들은 짐짓 "Jimmy who?"(지미가 누구야?)라고 허세를 떨었다. 그러나 그는 지명전에서 맥거번 등 거물들을 보기 좋게 넉다운시켰다. 기존 제도권에 대한 ‘반동의 바람’이 분 것이다.


노무현 등장과 카터의 중앙 무대 데뷔 사이에는 많은 유사점이 발견된다. 무명의 인사라는 정치적 비중말고도 그렇다. 먼저 정치 환경부터 살펴보자. 당시 워싱턴 정계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해서 직업 정치인들의 도덕성에 큰 회의가 일 때였다. 유권자들은 유들유들하고 느끼한 목소리의 닉슨을 향해 냉소와 지탄을 던졌다.

캐피톨 힐의 저 거물 정치인들은 어떤가? ‘코리아게이트’에, 섹스 스캔들에, 우편법 위반에-하루가 멀게 터져 나온 의원 나리들의 불법과 비윤리 행각에 넌덜머리를 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럴 때 나타난 구원자가 지미 카터였다. "정치 능력? 그보다 도둑놈 심보 안 가진 자라면 그게 더 낫다"-이것이 당시 미국민들의 한결같은 소망이었다.

요즘 한국에 그 유사한 분위기라도 있는 것일까? 답변은 "예스"다. 정치권은 누구 할 것 없이 모두 썩었다고 국민들은 울분에 떨고 있다. 대통령의 아들들, 처가 식구, 최측근 인사들, 청와대, 검찰, 국가 정보원 등 권력기관의 핵심 요직들과 여권 실세들이 온통 비리와 부정에 연루됐다. 따지고 보면 이건 예삿일이 아니다. 미국 같으면 대통령이 탄핵 당하고도 남음이 있는 엄청난 사태다. 질적으로 가장 나쁜 범죄인 은폐(Cover-up)가 밥먹듯 벌어지고 여차하면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해외로 줄행랑이다. 한통속이라 그런가, 그들은 유유히 인천 공항을 빠져나간다.

그러니 국민들 마음이 끓지 않겠는가. 사실 따지고 보면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은 유가 아니다. 충성파 부하들이 민주당사를 좀도둑처럼 뒤진 사건과 수백억원의 더러운 돈이 건네진 한국 권력층의 비리는 비교가 안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닉슨은 눈물을 흘리며 백악관을 떠났고 관련자들은 쇠고랑을 찼다.

반면에 우리 경우 DJ는 묵묵부답이고 관련자들은 부인 일변도고 수사 당국은 이 눈치 저 눈치 보기 바쁘다. 그 소용돌이 속에서 노무현이라는 이단아가 탄생했다. "학벌이 대수냐? 고생하고 자랐다니 서민 마음 잘 알지 않겠나". 보통 사람들의 이런 반응이 "노풍"을 몰아왔다. 그에 대한 검증이고 평가고 뭐고 할 것 없이 ‘바람’으로 뜬 것이다. DJ정권에 대해 욕을 해대는 이들도 ‘노풍’을 거든 것-이게 불가사의하지만 한국적 풍토요 현실이다.

노무현은 카터가 그랬듯이 진보적 정책을 들고 나왔다. 아니 좀 더 왼쪽의 좌파적 정치 노선을 분명히 했다. 복지정책, 의료보험, 부의 분배, 국방비 삭감, 실업 보험확대 등 정책적 색깔도 유사하다. 일부 정책은 급진적이기조차 하다. 대표적인 것이 주한 미군 철수문제다. 주한 미군이 통일의 장애라는 게 기본 입장이다. 보수와 좌파간에 뜨거운 논쟁거리인 국가 보안법을 철폐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이슈는 달라도 핵무기를 없애겠다던 카터 정책과 같은 맥락이다. 카터의 인권정책과 노무현의 민권 우선주의도 비슷하다.

혹자는 이렇게 반문할지 모른다. "그렇다면 노무현의 집권은 떼 논 당상인가? 마치 카터가 성공했듯이-" 그러나 이는 비약적이고 비현실적인 지레짐작이다. 분명 "바람의 사나이"임에는 틀림없지만 바람만으로 청와대를 장악할 수는 없다. 그는 이제 ‘시험대’ 위에 벌거벗고 서 있다. 미주알고주알 그에 관한 대해부가 시작될 것이다.

미지의 정치적 역량과 급진 좌파적 사고가 ‘분단 한국의 현실’에서 어떻게 평가될 것인지가 그가 안은 최대 숙제다. "DJ 후계자"라는 라벨도 결정적 장애다. 카터는 유리알처럼 투명한 전력과 "나이브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정직하고 고지식했다. 반면 노무현에겐 이중적이고 능수능란 재주꾼이라는 상반된 인물평이 서서히 고개를 드는 것도 좋은 징조는 아니다. 노무현의 대권장악을 장담할 수 없는 이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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