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돈 봉투

2002-05-02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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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 포먼 칼럼

어렸을 때 집에서 돈을 본 기억이 없다. 아버지는 월급을 받아 은행에 넣고는 수표를 쓰셨다. 커서도 돈을 만져볼 기회가 별로 없었다. 대학교에 다닐 때부터는 내 이름으로 은행구좌를 열어 주로 수표나 신용카드를 사용하였다. 돈은 은행 잔고에 수입과 지출을 기록하는 숫자라고 생각하였다. 화폐로 거래하는 것은 오히려 성가신 일처럼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도 나는 현금을 거의 지니지 않고 살고 있다.

나의 현금거래 경험은 한국과 연관된다. 한국에서 나는 첫 월급을 수표대신 돈이 들어 있는 월급봉투를 받았다. 몇 주일 전 다른 주에 있는 한인교회에 초청되어 설교하러 간 적이 있다. 예배가 끝난 후에 누군가가 나에게 봉투를 건네어 주었다. 나중에 열어보니까 100달러 짜리 세개, 20달러짜리 열개가 들어 있었다. 비행기 값과 하루에 100달러씩 이틀동안의 출장경비로 생각하고 받았지만 기분이 이상하였다. 주최측과 나 이외에 초청되어온 사람들 사이에도 봉투가 오고갔다.

요즘 한국신문을 보면 돈 봉투에 관한 기사로 가득하다. 정치하는 사람들, 특히 김대중 대통령의 아들들이 돈 봉투 함정에 빠져서 곤란을 겪고 있는 것을 본다. 기업도 돈 봉투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것을 본다. 교사들도 목사들도 큰 액수의 현금이 들어있는 돈 봉투로 문제가 생긴다. 뇌물을 받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사람들조차도 돈 봉투 그물에 걸리는 경우가 있다.


내가 아는 한국계 젊은 전도사에게 일어났던 일이다. 자신이 돌보고있던 학생 집에 심방을 가면 학생 어머니가 돈 봉투를 주더란다. 매번 봉투를 거절하였다 한다. 어느 날 그 학생의 어머니가 김치를 담아 주었다 한다. 정성이 담긴 선물이라 거절하지 못하고 집에 와서 김치보자기를 열어 보았더니 그 속에 돈 봉투가 있었다 한다.

봉투째 선교헌금으로 바쳤지만 자신도 모르게 그 학생에게 특별히 신경을 써주어야 한다는 부담감이 생기더라고 젊은 전도사는 고백하였다. 세상에 공짜가 없다. 특히 돈은 사람을 유혹하고 통제하는 힘을 가졌기에 뇌물이 펼치는 통제의 그물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공짜 돈을 받지 않는 것이 가장 현명하다.

선물이나 정당한 수고료도 돈봉투로 전해 받으면 기분이 이상하다. 은행구좌를 어린아이도 열어 수표를 사용할 수 있는 미국에서 한인들은 왜 아직도 귀찮게 현금거래를 하는 것일까. 한인들이 수표거래보다 현금거래 하기를 좋아하는 이유를 나 나름대로 생각하여본다.

첫째, 한인들이 현금거래를 좋아하는 이유는 은행을 믿지 못하는 마음에서 생긴 풍습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본다. 혹시 은행이 파산되는 경우 돈을 잃을까 염려하는 불안한 생각에서 현금거래를 선호하는지도 모른다. 나의 할아버지도 미국 경제공항 때 은행에 맡겼던 돈을 잃은 후 현금거래만 하였다.

둘째로 한인들이 현금거래를 좋아하는 이유는 현금으로 거래할 때 돈을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의 이름이 기록에 남지 않기 때문에 사업상 유익한 점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고용인들에게 보너스를 현금으로 준다든가, 불법 이민자를 고용하여 싼 월급을 현금으로 준다든가 하는 경우를 예로 들 수가 있다.

현금거래는 돈의 출처를 투명하게 밝히지 않아도 되고, 그래서 돈이 손에서 손으로 건네질 때 부과되어야 하는 세금을 피할 수도 있다. 한인사회에서 현금거래로 인한 탈세를 계산해본 사람이 있을까?
마지막으로 세상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이 한인도 돈을 만질 때 느끼는 촉감과 냄새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일보가 원고료로 나에게 매달 보내주는 봉투에 현금이 들어 있지 않고 수표가 들어있는 것을 나는 고맙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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