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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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단’의 위력을 아십니까

2002-04-23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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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 서울에선

좀 엉뚱한 소리 같지만 화투 놀이에서도 한국 사람 머리는 보통을 넘는다. 속칭 ‘고 스톱’의 절묘한 게임 창출-그 무궁무진한 조합술은, 그것이 도박의 나쁜 폐습이긴 해도 경이적이다. 개중엔 시국을 풍자하는 해학마저 숨어있어 묘미를 더한다. 80년대 초 전두환이라는 무명의 육군소장이 권력을 움켜 쥘 때는, 공산명월(8光)을 잡은 이가 상대 패에서 마음 내키는 대로 화투짝을 공출하는 룰(?)이 풍미했다. 여기에 걸려들면 일패도지, 쪽박 신세를 면할 길이 없었다. 3권을 싹쓸이한 절대권력자의 ‘두상’(볼드 헤어)을 빗대 만든 고약한 룰인 셈이다.

요즘처럼 최고권력 주변에 온갖 뒤숭숭한 이야기들이 나도는 판이니 예의 그 머리 좋은 ‘꾼들’이 그냥 지나칠 리 있겠는가. 2002년 판 ‘고 스톱’계의 최고 강자는 단연 ‘홍단’이다. 화투놀이를 한두 번 해 본 이는 1-2-3월의 홍단 띠가 그려진 패 정도는 알 것이다. 이번에는 홍단을 확보한 쪽이 무소불위, 상대 패에서 아무 것이나 끌어오는 전권을 휘 두른다. 하필이면 왜 홍단인가. 바로 DJ의 세 아들을 빗댄 게임이다. ‘홍’자 돌림의 장남 차남 삼남이 모두 각종 게이트에 연루됐다는 의혹으로 세상이 시끄러우면서 그 기발한 ‘룰’이 선을 보인 것이다. 여기에도 따끔한 해학이 숨어있음은 물론이다.

야당과 일부 언론이 제기한 세 아들 비리의혹은 놀라운 내용들이다. 요즘엔 자고 나면 서너 건씩 새로운 혐의가 폭로되는 판이다. 검찰이 수사에 착수했다니 그 결과를 지켜보아야겠지만, 도대체 그런 의혹을 받게끔 행동한 자체만으로도 공분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세간에 알려진 세 아들의 "비리 의혹"을 일일이 소개하기엔 지면이 부족할 정도다. 대충만 짚으면, IMF 사태로 거덜난 공기업에 퍼 넣은 공적자금 비리, 주가조작 벤처비리, 무기도입 비리에다 아태재단 비리까지 얹어 이른바 "4대 의혹사건에 세 아들이 이리저리 얽혀 있다"는 게 야당 측 주장이다. 또 최근엔 긴가민가한 의문도 제기됐다. 미국(LA)에서 치료 중인 큰아들 김홍일 의원을 면회하러 간 이희호 여사가 "외교행낭을 이용해 30여개의 박스를 가지고 갔는데 그 내용물이 무엇인지 공개하라"고 의혹 하나를 더 얹었다. 물론 청와대는 이를 강하게 부인했다.


장남 김홍일 의원의 경우 당초 예정된 2월 귀국이 자꾸 늦춰지고 있는데 대해 서울 정가에선 "’진승현 게이트’와의 관련 의혹 때문"이라고들 수군대고 있다. 둘째 아들 홍업씨는 "아태재단 흑막"(한나라당 표현)의 중심에 서 있다. DJ의 오랜 가신이었고 재단 부이사장인 홍업씨를 도와 상임이사로 일해 온 이수동이라는 이가 ‘이용호 게이트’에 깊숙이 연루됐음이 특검 수사로 드러나 여론의 화살은 아태와 홍업씨를 겨누고 있다. 미국 유학 중인 셋째 홍걸씨와 관련된 비리 의혹은 엉뚱한 일로 터졌다. 홍걸씨와 "아주 가까운" 최모라는 젊은이의 의문투성이 행각이 마각을 드러내면서 불똥이 그에게 튄 것이다. "홍걸에게 9억원을 주었다"고 언론에 겁없이 공개한 그를 검찰이 조사중이므로 그 결과를 지켜봐야겠다.

대통령의 세 아들이 의혹의 중심으로 몰리자 한나라당 쪽에선 "어느 세상 천지에 이런 싹쓸이 부패가 있을 수 있는가. 세 아들은 검찰에 자진 출두하고 김대통령도 조사를 받아야한다"고 DJ를 정조준했다. 그리고 "대통령 세 아들 관련 특별검사 임명에 관한 결의안"을 국회에 냈다. 국민들 속내도 끓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집권 4년 동안 청와대, 국가 정보원, 경찰, 금융감독원 등 국가 주요 권력의 핵심부가 주가조작이니, 보물선 발굴이니, 차명계좌 관리니 온갖 편·불법 방법을 동원해 사복을 채웠다. 이런 자들을 감옥에 보내야할 검찰은 "고향의 형님 아우"하면서 불법을 덮어주었다.

대통령 친인척의 비리를 감시해야 할 경찰청 특수과의 고위 책임자는 "한통 속 해먹기"가 들통나자 외국으로 튀지를 않나, 하여튼 속속들이 썩고 곪아터진 형상이다. 그러니 시장판에서, 목욕탕에서 최고위층을 향해 노골적인 분노의 소리가 뱉어지고 있음은 필연이 아니겠는가. "세상에 이럴 수 있나? 대통령의 아들들, 처조카, 가신, 권력 핵심부가 이처럼 의혹의 진 수렁에 코가 빠진 예가 있단 말인가?"--- 아직은 "의혹" 수준인데도 민초들은 기정 사실인양 북악 밑의 청기와 집을 손가락질하고 있다.

이런 와중에 김 대통령이 엿새간 병원 신세를 졌다. "과로에 의한 소화불량과 수면부족"이라는 게 주치의 진단이다. 하지만 "세 아들 문제로 심리적 고통을 받은 탓"이라는 말도 들린다. 하기야 이렇게 된 책임을 누구에게 전가하겠는가. DJ는 취임 초 "내 가족문제는 비정하리 만치 다루겠다"고 철석같이 약조하지 않았던가. DJ의 아들들도 부친의 위세를 업고 YS의 차남 김현철씨가 그랬듯이 호가호위(狐假虎威), 이권을 쫓고 국정 농단을 자행했단 말인가. 욕하면서 배운다더니 꼭 그 꼴이란 자조가 나올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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