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신문에 난 가족사진

2002-04-18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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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 포먼 칼럼

비참한 뉴스를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지에서 처음 읽었다. 아침식사를 하면서 조간신문을 대충 훑고 있는데, "여자가 두 딸과 남편을 권총으로 쏘아 죽이고 자살하다"라는 헤드라인이 나의 주의를 끌었다. "비참한 일이 또 생겼구나"라고 생각하며 기사를 자세히 읽었다. 사건이 일어난 곳이 샌타클라라이고 죽은 엄마가 "태 쉬퍼"라는 이름 때문에 "혹시 한국여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닐 꺼야. 중국사람일지도 몰라." 하고 생각한 후, 비참한 이야기를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출근하였다.

세 단계를 거쳐서 낯선 사람이 우리에게 소개되어지기도 한다. 첫 단계에서는 이름으로, 두 번째 단계는 사진으로, 세 번째 단계에서는 우리와 똑같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으로 소개되어지기도 한다. 쉬퍼 가족도 나에게 이러한 세 단계를 거쳐 소개되었다.

쉬퍼 가족의 비극적인 사건을 신문에서 처음 읽었을 때 그들은 뉴스에 보도된 한낱 이름에 불과 하였다. 다음 날 아침 크로니클지에 실린 그들의 가족사진을 보며 한국사람과 관련된 사건이기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읽었다. 사진 속에서 네 사람이 활짝 웃고 있었다. 엄마가 가운데 앉고, 양쪽에 아이들이 엄마에게 기대어 서있고 남편이 아내 뒤에 서있는 사진은 어느 집에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가족사진이었다.


왜 이처럼 평범한 사람들의 가족사진이 신문에 실릴 때는 꼭 비참한 일이 일어난 후일까? 신문에 실린 비극의 가족을 더 이상 쳐다볼 수 없어 눈을 허공으로 돌렸다. 식당 벽에 걸린 우리 집 식구 가족사진에 눈이 멈추었다. 아시안 여자, 서양남자, 아이들 둘. 네 명의 사람들이 웃고 있는 모습이 신문에 있는 사진과 너무도 비슷하였다. 만약 우리 가족사진이 신문에 실린다면 아마 이처럼 비극적인 상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자 소름이 끼쳤다.

다시 신문으로 눈을 돌려 쉬퍼 식구들의 가족사진을 자세히 보았다. 왜 이처럼 평범치 않는 비극이 이처럼 평범한 가족에게 일어났단 말인가?

오후에 우편으로 배달된 한국일보에 실린 사진도 똑같은 사진이었는데, 좀더 크게 확대하여 실렸다. 신문 기사를 읽은 후 아내와 사건에 대해여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아내는 장난기 섞인 미소를 지으며 "당신 조심하세요. 한국여자 한번 마음먹으면 못하는 일이 없어요" 하며 농담을 하였다. 고약한 농담이지만, 유머는 긴장을 해소하는 좋은 도구이다.

다음 며칠동안 그들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보도되었다. 남편은 독일사람이고, 딸들은 주위에서 칭찬 받는 모범생들이며,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되고 있는 태 쉬퍼는 친절하고 활발한 사람이라고, 이웃들은 입을 모아 쉬퍼 가족을 칭찬하였다. 이처럼 비참한 일이 그들의 이웃에게 일어났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다고 안타까워하였다. 크리스마스 때 남편이 가족들에게 보낸 편지에도 평범한 가족들의 모습이 역력하였다.

왜 이러한 사건이 일어날까? 누군가가 이처럼 비참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미리 방지할 수는 없을까? 엄마가 사랑하는 자식을 죽여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누가 감히 이 가족에 대해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 전설, 미디아(Medea)가 생각난다. 남편에게 배반당한 아내가 자식을 죽이는 비극이다. 미디아는 남편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그들의 아들을 남편으로부터 빼앗기 위해 자기 손으로 자기 아들을 죽인다. 남편을 향한 그녀의 증오가 자식을 향한 그녀의 사랑보다 더 컸던 것이다. 미디아의 비극이 오늘날 우리 지역사회에서도 일어났단 말인가?

우리 각자 안에 증오의 괴물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덕적인 훈련과, 남을 측은히 여기는 동정심과 의지로서 괴물을 멀리하며 살아간다. 증오의 불길이 활활 타고 있을 때, 극심한 정신적인 타격으로 정서가 불안정 사람이 권총을 손에 쉽게 넣을 수 있는 환경에서, 네 명의 가족이 신문에 날 수도 있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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