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제 배불리고 이름내는 도구 아니다

2002-04-1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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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멘터리 21>

▶ 박봉현 편집위원

자체 감사기능 소홀해 ‘썩은 사과’ 방치
성실한 구호단체까지 선의의 피해 우려
사심 버리고 오로지 인도주의 정신으로

북한 돕기를 표방하는 한미구호재단의 사무총장 이오연 목사가 폐기처분대상 의약품을 미국에서 한국으로 위장 반입해 거래한 혐의를 받고 있다. 북한과 한국의 불우이웃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미국재단으로부터 의약품을 기부 받아 한국으로 보낸 뒤 그 대가로 수만달러를 챙긴 혐의다. 한국검찰 수사결과 진위가 밝혀지겠지만 목회자가 이같은 의혹의 대상이란 사실만으로도 충격이 아닐 수 없다.


LA에 사는 한 할머니는 북한에 있는 조카에게 물건도 보내고 소액이지만 돈도 보낸다. 지난해 조카딸이 대학에 가고 싶어하는 하는 데 등록금이 없다는 연락을 받고는 친척들과 의논해 십시일반으로 1,000달러를 모아 캐나다를 경유해 북한으로 우송했다.


그런데 지난 2월1일자 소인이 찍힌 편지에서 북한의 조카가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북한 은행에서 돈을 보관하고 있으나 규정에 따라 돈을 내줄 수 없고, 7월 이후 입금된 돈에 한해서 20%만 배분할 수 있다는 전갈을 받았다는 것이다. 결국 이 조카는 7월 이전 LA에서 보낸 돈을 사용할 수 없고, 딸의 학비 걱정으로 잠을 이루지 못한다고 했다. LA친척들은 "돈을 보내봐야 당사자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니 소용없는 일 아니냐. 앞으로 어찌해야 할 지 모르겠다"며 답답해했다.

북한정부의 비상식적인 처사에 개인간 송금은 점점 그 빛이 바래고 있다. 그래서 북한이 함부로 못할 규모가 크고 지명도가 있는 기관이나 단체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커지고 있다. 그런데 이 중 일부가 북한 돕기보단 매명과 제 배불리기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지적이 일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다.

북한 돕기 단체나 기관의 문제점은 상당 부분 실무자의 부조리에서 비롯된다. 한 단체에서 활동하던 사람이 수년 전 북한을 돕기 위한 의약품을 한국에 들여가 4만여달러를 챙긴 일이 있었다. 당시 이 일로 골치를 앓았다는 한 단체장은 "당사자에게 돈을 내놓으라고 하자 단체에서 탈퇴해 버젓이 새로운 비영리단체를 주정부에 등록했다"고 했다. 교묘한 수법으로 ‘검은 돈’을 주머니에 간직했으니 북한 돕기를 개인 비즈니스의 도구로 악용한 것이다.

북한 돕기 의약품은 머시 코어 인터내셔널(MCI)과 같은 미국기관이 제약회사로부터 유효기간이 거의 다 된 약을 받아 구호단체에 전달한다. 이 의약품을 넘겨받을 때는 반드시 "개인적인 용도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문서에 서명하고 사용 및 수송과정에 대해서도 보고해야 하지만 이 규정이 종종 무시되곤 한다.

거래선으로부터 뒷돈을 요구하는 게 바로 그 양태다. 이번에 한국검찰의 조사를 받고 있는 이 목사의 혐의도 이 범주에 속한다. 일반인보다 높은 도덕률을 따라야 하는 목회자가 교회의 이름으로, 피골이 상접한 북한 동포 돕기의 이름으로 죄를 짓는다면 그 죄질이 더 나쁜 것이다.

구호단체의 비리는 자체감사 기능에 적신호가 켜져 있음을 시사한다. 외부감사를 두고 있는 곳도 있지만 비용절감 등 이유로 자체감사에 의지하면서 ‘우물우물’ 넘어가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게 관계자들의 고백이다. 아예 감사기능이 마비된 곳도 있다고 한다. 옛이야기지만 폭동성금관리위원회가 공금유용 스캔들로 혼쭐난 것도 감사기능 소홀에 기인했다.

북한이 불투명한 사회라 지원품이 잘 도착됐는지 검증할 도리가 별로 없는데 구호단체마저 투명한 자세를 보이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구를 믿으란 말인가. 교계단체이든 사회단체이든 북한 돕기와 관련된 곳은 우선 재정운영에 대해 한치의 의혹도 남겨둬선 안될 것이다.


한 두 마리 미꾸라지가 물을 흐려 주류사회에서 한인구호단체에 대해 부정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목소리도 있다. 미국기관이 당장 무슨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것이란 게 관계자들의 중론이지만, "건실한 단체들의 구호사업이 지장을 받지 않을까 우려된다"는 한 목회자의 말이 과민반응만은 아니다.

한인사회에서도 유사한 성금캠페인에 호응이 떨어질 수도 있다. "누구 좋을 일 시키려고 돈을 내겠느냐"는 인식이 확산되면 양심적인 단체의 긴요한 활동이 위축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선교사업 재원마련이 어려웠는데 이번 사건으로 더 힘들어지지 않을까 염려된다"는 한 교회 북한선교회 관계자의 말에 어렵지 않게 공감할 수 있는 상황이다.

봉사란 미명아래 미국과 한국을 넘나들며 나쁜 짓을 일삼아 미주한인들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점도 우리를 성나게 한다. 본인은 사고를 치고 감옥에 가면 될지 모르지만 사안이 부풀려져 "교포=사기꾼"이란 등식이 조금씩 자리잡아 간다면 그 책임은 어떻게 질 것인가.

일부 구호단체의 생색내기도 지양돼야 한다. 의약품을 북한에 보낸다면서 그 규모를 수백만달러라고 홍보하는 경우가 가끔 있다. 좋은 일이라 한껏 자랑하고 싶겠지만 의약품은 미국기관이 제공하는 것이고 한인구호단체에선 북한에 보내는 운송비 등만을 지불하는 것이 통례다. 20피트짜리 컨테이너의 경우 1만2,000달러, 40피트짜리는 2만2,000달러 내지 2만4,000달러를 내면 목적지에 전달해 주게 돼 있다. 의약품 모두를 구입해 보내는 것처럼 허세를 부리는 것도 이젠 그만 했으면 한다.

차제에 대북 지원과 직접적 관련은 없지만 무산된 이산가족 상봉과 방북단 이슈에 있어서도 관계자들의 자성이 요구된다. 사전에 중개인으로부터 약속을 얻었다해도 막판에 예기치 않은 일로 무산되는 게 한 두 번이 아니지 않은가.

중간 기착지인 중국에 묶여 발만 동동 구르는 이산가족의 심정을 관계자들은 깊이 헤아려야 할 것이다. 유엔 북한대표부가 "모르는 일"이라고 할 정도라면 ‘설익은’ 계획이었음에 틀림없다. 불가피한 요소가 없진 않겠지만 계획에 없던 현지에서의 모금과 같은 즉흥적인 행동도 잡음을 일으킨다. 설레던 마음을 접고 귀국하는 실향민의 가슴을 두 번 도려내서는 안될 것이다.

부시의 ‘악의 축’ 발언 이후 얼어붙었던 남북관계에 온기가 스미고 있으니 머지 않아 북한 돕기 구호단체의 활동도 활기를 찾을 것이다. 하지만 ‘얼굴 한번 내밀어 볼까" "돈 좀 챙길까"하는 생각이 털끝만치라도 있는 사람은 커뮤니티가 주시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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