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산다는 것」에서 인간의 삶을 3단계로 분류했다. 첫 단계는 먹고 살아야하는 생리욕구(to live), 둘째 단계는 재산이나 지위, 명예등을 추구하는 소유욕구(to have), 셋째 단계는 정신적 가치를 존중하는 가운데 기쁨을 누리고자 하는 존재욕구(to be)다. 즉, 새로운 인간, 새로운 사회가치는 최초의 생리욕구를 벗어나면 소유인간에서 존재인간으로서의 발돋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프롬의 이론으로 볼 때 한인사회는 어느 단계에 있는지 정확히 가늠하기 어려우나 아마도 생리욕구 단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이유를 설명하자면 이렇다. 한인타운에 이름은 같고 성씨만 다른 개인 안과 병원이 두 곳 있다. 몇해 전 A안과에 예약을 하고 B안과로 잘못 찾아갔던 일이 있었다. 진료를 시작 할 무렵 의사의 이름을 보고 성씨가 다른 것을 발견, 의사에게 A안과에 예약했는데 잘못 찾아와서 죄송하다고 했더니 "아무데서 치료를 받으면 어때요, 제가 잘 봐 드릴테니 앉으세요" 하는 것이었다. 의사의 체면을 생각해서 하는 수 없이 일어서지 못하고 치료를 받았다.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의사가 공급과잉이라지만 존경받는 직업을 가진 의사마저….
또 있다. 어떤 젊은 엄마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횡단보도를 두고 초등학생쯤 되는 어린 딸의 손을 잡고 차도를 건너 왔다. 딸이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 선생님이 횡단보도에 파란 불이 들어오면 건너랬어..."아이가 제법 큰소리로 엄마에게 항의하자 엄마는 차도를 무단횡단할 때 아이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끌고 건너왔던 것처럼 팔을 나꿔채 지나가 버렸다.
딸의 물음에 엄마는 무엇이라고 대답했을까? "엄마는 바빠서 그랬지만, 너는 꼭 횡단보도로 건너라. 차 조심하고..." 이렇게 대답했을 걸로 짐작해 보지만 나는 해도 되고 너는 하면 안된다고 하는 이율배반적 행위를 보면서, 한인사회가 한 단계 올라갈 때도 되었으련만 아직도 멀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자기 아이들의 요구는 무조건 들어주면서 정작 자기 부모는 홀대하거나 아예 양로원으로 들여보내는 아버지와 어머니들을 보면서 자라나는 아이들은 무엇을 생각하며 어떤 각오를 하게될까? 내가 대접을 받고 싶으면 먼저 대접을 해야하는 것이 순서다. 내가 내 부모를 잘 모시지 않으면 내 자식이 나를 잘 모시지 않을 것이란 것은 상식이다.
얼마 전 네팔에서 온 노동자들이 명동성당에서 ‘인간 취급을 해달라’고 부르짖으며 농성하던 모습을 기억해 보자. 한국이 언제부터 그렇게 잘사는 나라가 되었다고 외국 근로자들에게 터무니없는 부당행위를 할 수 있단 말인가. 동남아 어떤 나라에서는 한국으로 보내는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해외취업 교육과정에 ‘모욕훈련’이라는 게 있다는 소리도 들었다. 한국인 고용주가 욕을 하고 뺨을 때리더라도 꾹 참는 연습을 시킨다는 말이다. 이래가지고는 한국인이 어디가도 대접받을 수가 없다. 21세기는 말 그대로 민족도, 국경도, 이념도 초월한 지구촌 시대다.
어느 조그만 연못에 물고기 두 마리가 살았다 그리 넓지 못한 공간에서 서로 부딪치며 사는 것이 싫어서 서로가 서로를 원망하고, 미워하고, 저주했다. 상대방만 없다면 세상이 더없이 행복 할 것만 같았다. 함께 살 때 보다 먹을 것도 두 배 이상 많을 것이고 공간도 훨씬 넓고 쾌적해져 좋을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소원이 이루어졌다. 시름시름 앓던 한 마리가 죽어버린 것이다. 남은 한 마리는 춤을 추며 좋아했다. 소원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상대방 물고기의 죽음으로 인해 물이 썩게되어 도저히 숨을 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남은 한 마리의 물고기는 상대를 저주했던 자신이 어리석었음을 후회했지만 그것은 영영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세계의 모든 인종이 어우러져 사는 이 땅에서 한국인이 대접을 받으려면 정신적 가치를 존중하는 존재욕구의 단계로 발전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함께 하는 타민족들에게 보다 너그럽게 대할 줄도 알아야한다. 아무데서나 무단횡단을 하고, 남의 손님을 가로채고, 길거리에 담배꽁초를 함부로 버리고, 식당에서 큰소리로 떠들고, 길을 가다 옆 사람과 부딪쳐도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하지 않는... 기초질서를 지키지 않고는 대접을 받을 수가 없다. 우리는 언제쯤 대접받는 한국인이 될까. 길이 없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