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민자의 축복을 회복하자

2001-02-22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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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사이드

▶ 옥세철 <논설실장>

단어라고 하는 것은 때로 사전적 의미와 전혀 다르게 사용된다. Jew라는 단어가 그렇다. 문자적 의미는 유대인, 혹은 유대교도를 가르킨다. 이 단어는 그러나 많은 경우 부정적 의미를 전달한다. 약아빠진 장사꾼, 수전노, 고리대금업자 등의 의미다.

Jew라는 단어가 왜 이렇게 부정적 의미를 지니게 됐는지 S. I. 하야카와는 ‘유대인의 디아스포라’역사와 관련해 설명하고 있다. 세계 각처로 흩어져 살아온 유대인의 역사는 한마디로 고난의 역사였다. 농토 소유도 금지됐고, 제조업 길드에도 가입할 수 없었다. 이런 악조건에서 유대인들은 스스로 생존술을 개발해야 했다. 고리대금업으로 불리는 금융업과 장사의 기술이었다. 언제 추방령이 내려질지 모르는 박해속에서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유대인들에 대해 편견이 쌓이기 시작했다. 결국 ‘피도 눈물도 없는 샤일록’이라는 식으로 유대인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이 형성됐다는 이야기다.

‘유대인’이란 단어에 따라붙는 부정적 이미지는 사실에 있어서는 유대 민족의 특성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는 게 하야카와가 설명하려는 요점이다. 어느 민족이든, 어느 그룹이든 광야에 버려진 존재 같이 되면 나름의 억척스러운 생존술을 터득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형성된 특질은 민족성과 관계없이 Jew라는 단어의 부정적 의미가 주는 특질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그같은 특질은 오늘날에는 ‘주변 기업인’(marginal businessman)으로 불리는 사람들에게서 흔히 발견된다. ‘주변 기업인’은 문자 그대로 주류 사회는 거들떠보지 않는 비즈니스 종사자다. 이민의 나라 미국에서 ‘주변 기업’은 그러므로 항용 새로운 이민그룹의 주력 업종과 동일시된다. 주변 기업인들은 백인들은 쳐다보지도 않는 업종에 매달려 하루 12시간 이상의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또 생존과 어떻게 하든 돈을 벌어야 한다는 게 이들의 지상 과제로, 자연 억척스런 생명력이 이들의 특성이다.


이런 이민그룹의 주변 기업에서 시작된 게 영화 산업이다. 초창기 때 주류 기업은 영화를 장난감 정도로 취급했다. 이 신종 비즈니스의 가치를 내다보고 매달려온 사람들이 유대인이다. 영화산업은 오늘날 전 세계적 비즈니스가 됐다.

"미국은 돈에 미친 사람들의 나라다. 사람들은 교양이 없다. 물질주의만 판치고 모두 돈벌이에 혈안이 돼 있다" ‘19세기의 미국 사회’에 대해 유럽인들이 내비친 경멸의 시각이다. 이는 다른 말로 하면 100여년전 미국은 ‘주변 기업인들의 나라’였다는 지적이다. 19세기의 미국 사회는 오늘날에는 이민 커뮤니티에서나 찾아볼 수 밖에 없는 도전정신과 억척같은 생명력으로 충만해 있었다는 증언이기도 하다.

이민자들의 이같은 도전은 축복으로 이어진다. 기회의 땅 미국에서 꿈을 가지고 밤낮을 가리지않고 뛴 이민자들이 한세기만에 미국을 전 세계에서 가장 축복된 땅으로 변모시킨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이민은 축복이다. 이민자는 선택된 사람이다. 이 명제는 과학적 조사로도 이미 입증됐다. "같은 민족이라도 ‘대이동’(Exodus)을 경험한 집단은 한 곳에 안주해 있는 집단에 비해 엄청나게 강한 생명력을 보인다"는 사실이 증명된 것이다. 유대계, 자메이카계 등 숱한 이민 그룹이 이 땅에서 이룩한 신화가 바로 그 실례다.

성서적으로도 이민은 축복이다. 조상이 살던 땅을 떠나는 아브라함, 애굽으로 흘러들어가는 요셉 등 창세기 주인공들은 모두 이민자의 전형이다. 이 창세기 영웅들의 노마드적 삶에는 항상 축복이 임한다. 또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대이동은 거대한 축복의 계획하에 이뤄지는 것으로 성경은 기술하고 있다.

한인 이민 한 세기를 눈앞에 두고 이민사 재조명 작업이 한창이다. 일종의 ‘뿌리 찾기’운동이고, 한인의 정체성(identity) 확립 작업인 셈이다. 한인 이민 100주 기념 사업은 그러나 이로 그쳐서는 안된다고 본다. 한가지가 더 첨가되어야 된다. 초기 이민시대의 억척같은 개척정신도 되살리는 운동이다.

’단돈 300달러를 들고 와 거대 기업을 일으켰다’ ‘10년 바느질로 남편 박사 학위 따는 것을 뒷바라지 했다’ 타운건설의 밑바탕이 된 한인 이민 신화가 요즘에는 어쩐지 잘 들리지 않아서 하는 소리다. 고통속에서도 꿈을 잃지않고 벽돌을 한 장씩 쌓아올린 ‘주변 기업인의 정신’을 되살릴 때 이민자에게 부어진 축복이 회복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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