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버리고 왔어야 할 유산

2001-02-21 (수)
크게 작게

▶ 박봉진<수필가>

"요새 이민 오는 사람들의 짐 속에는 무엇이 들어 있을까" 하고 상상을 해보았다. 개중에는 피땀 흘려 모은 가산을 IMF 때문에 날려버리고, 일인당 1,000달러 한도금과 애국심만을 챙겨왔던 옛날 우리 이민자들처럼, 몇가지 일용품에 재기의 의욕만 챙겨온 사람도 있을 것이고. 더러는 부동산 가치 상승의 횡재라든지 불로소득의 달러 뭉치나 떵떵거렸던 권위의식을 신주 모시듯 챙겨온 사람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이민 짐 속에 이것저것 챙겨올 것이 별로 없었던 나는 젊은 날 계수 업무에 파묻혀 이골이 나도록 매만졌던 속대가 닳아버린 주산과 숫자 칸칸 앞에 수없이 찍어댔던 한쪽 글자가 마모된 상아 도장을 챙겨왔으며, 어떤 분은 오랜 셋방 신세를 면하고 처음 장만했던 집 문패와 연탄 집게와 요강도 챙겨왔다고 했다. 그것들은 아무 데도 쓰일 데가 없는 물건들이지만 삶의 구비구비에 얽히고 설켰던 애환의 상징이었기에 그저 웃고 넘겨버릴 수 없었다.

70년대 이전부터 이민자들에게나 해외 여행자들에겐 거의 한 세대가 바꿔져가는 지금까지도 귓전에 맴돌고 있는 말이 있다. 그것은 "미국은 신용사회"란 것과 "각자는 국가 민족을 대표하는 민간 외교관"이라고 소양교육에서 들은 말이다. 외국에 나와서 애국 애족의 마음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마는 그때 사람들은 어디서 동포를 만나면 정답게 지냈던 이웃처럼 반가워했고, 한국의 날 퍼레이드 때나 가끔 한국 선수가 출전하는 운동경기가 있으면 먼길을 마다 않고 가서 목이 쉴 정도로 환호와 박수 갈채를 보냈었다.


그때 주류사회 사람들에겐 ‘코리안’의 이미지는 거의 각인되어 있지 않았었기에 동양인이면 으레 좋은 이미지 쪽은 ‘재패니스’인 줄로 여겨졌고, 그렇지 않은 쪽의 이미지는 ‘차이니스’인 줄로 여겨졌다.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서나 약간의 명암 현상이 노출되게 마련인지라 동포들 중에는 간혹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연출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 덕택에 공치사는 일본인들이 들었고 욕은 애꿎은 중국인들에게 돌아간 웃지 못할 일들이 생기곤 했었다.

동포 이민사회가 백인 범법자들로 시작된 초기 호주 이민사와는 근원적으로 다른데, 점차 대형화되고 다양화되어서 그럴까. 중범자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지도자연하는 사람들의 낯뜨거운 행위가 동포들을 부끄럽게 하고 있다. 얼마전 무슨 행사에서 클린턴 전대통령 부부와 사진을 찍고 큰 액수의 후원금을 냈던 사람들 중 상당수가 과시욕으로 냈다가 나중에 아까워서 부도를 냈던 고로 사진을 받지 못함은 물론이고 동포 사회의 신뢰에 큰 손상을 끼쳤다고 했다.

그들의 이민 보따리에 챙겨올 것이 마땅치 않았다면 정든 땅의 아련한 첫사랑의 추억이라도 가슴에 묻어와서 메마른 심성을 적셨으면 좋으련만, 어쩌자고 졸부 근성과 천박한 허욕에다 허풍을 버리고 오지 않아서 동포사회를 부끄럽게 하는지 모르겠다. "신의를 중히 여기며 야비한 술책을 쓰지 말라"는 몽테뉴의 말을 들려준들 그들에겐 아무 소용없을 것이란 것이 안타깝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