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9단의 경지

2001-02-21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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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삼국시대 위무제 조조(曹操)는 명문장을 읽으면 두통이 가신다고 했다. 조조 자신이 두 아들과 함께 ‘삼조’(三曹)로 불릴 정도로 일대의 문명을 떨친 시인임을 감안할 때 꽤 수긍이 가는 이야기로 들린다.

오랜만에 머리가 시원해지는 뉴스가 보도됐다. 한국의 이창호 9단이 중국의 창하오 9단을 꺽고 바둑 올림픽인 응창기배를 차지했다. 일본, 중국의 숱한 고수를 모두 제끼고 바둑 올림픽에서 한국이 4연패를 달성하는 기록을 세운 것이다.

현대 바둑의 종주국임을 자부하는 일본의 프로 기사는 450여명에 이른다. 중국의 프로 기사는 320여명. 예비병력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더 늘어난다. 한국은 프로 기사가 170여명이다. 이 프로 기사라는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신동 소리를 들어온 사람이다. 대다수가 고시보다 훨씬 어렵다는 입단의 관문을 10대의 어린 나이에 통과했기 때문이다. 거기다가 바둑에 관한한 이들은 모두가 백과사전적 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야말로 ‘숨어 있는 용이고 웅쿠린 호랑이’ 같은 존재들이다.


이런 기라성같은 프로 기사들중에서 가리고 가려 절정의 기량을 갖추고 있는 온 천하의 고수들만이 참가하는 게 바둑 올림픽인 응창기배 대회다. 이창호는 4년마다 열리는 이 바둑 올림픽에서 우승했다. ‘하늘의 별따기’라는 표현으도 잘 실감이 안되는 일을 해낸 것이다.

이창호의 우승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 이 바둑 올림픽의 첫 우승자가 조훈현, 2회 우승자가 서봉수, 3회 우승자가 유창혁으로 이번 4회대회에서도 이창호가 우승해 ‘세계바둑 지존’의 법통을 한국의 9단이 이었다는 의미다.

’4인방’으로 불리는 이들 한국의 9단들은 바둑에 관한한 세계화를 진작 이룩했다. 바둑 올림픽 4연패에다가 각종 국제기전, 국가별 단체 대항전 등에서 잇달아 우승, 세계를 평정했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류’는 세계 바둑계에서 공포의 대상이다.

고수의 바둑에는 고고한 품격이 배어 있다. 경지에 오른 명필의 솜씨나 명문장을 방불케 한다. 우선 그 행마가 유려하다. 나갈 때와 물러 설 때에 통달해 있다. 사기수나, 꼼수따위는 있을 수가 없다. 집 차이가 한두집에 불과해도 승부처가 없으면 담담히 돌을 거둔다. 고수가 둔 바둑을 뒤쫓다보면 그래서 머리가 개운해진다.

9단으로 행세하는 사람들이 주름잡고 있는 게 한국의 정치판이다. 그런데 그 형국이 영 말씀이 아니다. 정수는 찾을 수가 없고 온통 꼼수에 사기수다. 9단으로 알려진 분들의 행마도 그렇다. 그 속이 너무 빤히 들여다 보인다. 또 승부처도 없는 곳에서 수를 낸다며 엉뚱한 짓이나 하고 있다. 이건 9급 솜씨에도 미달이라고 해야할지…

머리가 시원해 지는 정치, 쳇증이 확뚤리는 정치. 이런 걸 기대하는 게 애당초 무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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