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럼스펠드를 주목하라’

2001-02-08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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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사이드

▶ 옥세철 논설위원

지도자의 그릇은 흔히 용인술로 나타난다. ‘재상집 문객 중에는 반드시 재상감이 있게 마련이다’ 지도자의 ‘사람 보는 눈’의 중요성을 겨냥해 나온 옛말이다. 이와 관련해 잘 알려진 고사가 중국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의 이야기다. 요즘으로 치면 시골 면장에 불과했던 그가 난세에 천하를 통일하고 통일왕조의 제왕이 된 비결은 장량·소하·한신 등 당대의 인재를 잘 알아보고 기용했기 때문이라는 본인의 술회다.

조지 W 부시가 조각을 마치자 한 풍자만화가 인기를 끌었다. 난쟁이 모습의 조지 W가 딕 체니, 콜린 파월 등 거인에 둘러싸인 만화다. ‘애송이’ 조지 W가 이런 거물들 틈에서 과연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 하는 풍자다. 우선 파월만 해도 그렇다. 그는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는 국민적 영웅이다. 이런 국무장관에게 대통령으로서 조지 W의 영이 서겠느냐는 게 일부의 우려다. 또 체니와 관련해서는 ‘미국이 총리제를 도입했다’는 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워싱턴 사정에도 어둡고, 해외정책에도 경험이 없는 조지 W인 만큼 실제적인 국정 수행자는 부통령인 체니가 될 것이라는 비아냥이다.

조지 W 내각의 최대 ‘와일드 카드’는 그러나 이들이 아니다. 도널드 럼스펠드다. 체니나 파월은 어찌됐든 ‘아버지 조지 부시의 사람’이다. 이에 반해 럼스펠드는 한때 아버지 부시와 라이벌 관계에 있던 인물이다. 거기다가 그는 한 세대 전에 이미 국방장관을 지낸 당내 원로로 대통령에게 언제라도 ‘노’(No)라고 말할 수 있는 수퍼 헤비급 정치인이다. 때문에 조지 W로서 아주 벅찬 상대가 아니냐는 추측이 나오고 있는 것이다.


한 세대 전, 그러니까 1960년대, 70년대 공화당 내에서 ‘크라운 프린스’로서 가장 유망시 된 인물은 럼스펠드였다. 장래 지도자로서 럼스펠드의 자질을 일찍이 간파, 주요 공직에 처음 발탁해 키운 사람이 닉슨이다. 30대의 럼스펠드를 나토 대사로 임명했던 것이다. 이후 포드 행정부에서 백악관 비서실장, 국방장관 등을 역임하면서 럼스펠드는 황태자 교육을 받아왔다. 이 럼스펠드가 당시 자기 사람으로 키운 인물이 현재의 부통령인 체니다. 럼스펠드는 말하자면 체니의 정치적 스승인 셈이다.

최연소 국방장관등 기록을 세우며 욱일승천의 기세로 뻗어가던 럼스펠드의 대권 꿈은 80년대 들어 꺾인다. 함께 포드 행정부에서 CIA 국장을 지낸 조지 부시가 차기 대권주자로 급부상하면서 럼스펠드는 뒤로 밀린 것이다. 대권경쟁에서는 뒤졌지만 럼스펠드는 경쟁자 부시를 내심 과소평가해 왔다. ‘뚜렷한 아젠다가 없는 인물’이라는 게 럼스펠드의 부시에 대한 평가. 그가 부시에 대한 인식을 바꾼 게 걸프전 때다. 쿠웨이트를 침공한 사담 후세인의 이라크에 대해 단호한 응징에 나서자 부시를 지지, 평가를 달리했다는 것이다.

이런 전력의 럼스펠드가 과거 라이벌의 아들인 조지 W의 부름에는 흔연히 응해 25년만에 다시 국방장관직을 맡은 것이다. 아무리 국가에 대한 서비스를 최우선시 하는 게 미공직자 사회의 풍토라고 해도 이같은 경우는 극히 드문 일이다. 이런 묘한 관계 때문에 ‘대통령으로서 조지 W와 국방장관으로서 럼스펠드’의 새로운 관계에 워싱턴 정가는 비상한 관심을 쏟고 있다. 말하자면 조지 W가 얼마만큼이나 럼스펠드를 품을 수 있느냐에 따라 그의 용인술이 판정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일종의 조지 W의 지도력 테스트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럼스펠드는 요즘 워싱턴 정가의 주목만 받는 게 아니다. 전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다. 부시 행정부 출범과 함께 그가 강력히 주장해온 국가미사일방위(NMD) 체제 구축이 최우선의 아젠다로 떠오르고 있어서다. NMD체제 구축을 서두른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북한, 이라크등 이른바 ‘깡패국가’들의 도전을 조금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힘을 사용해서라도 목표를 관철하는 현실주의 정책’을 펴겠다는 선언이다.

43세 최연소 국방장관 시절 럼스펠드는 그 유명한 헨리 키신저와의 기 싸움에서 조금도 밀리지 않고 대소련 강경책을 관철시킨 에피소드로 유명하다. 이런 럼스펠드가 이제 다시 미 국방정책의 최선두에 서서 독수리의 눈매로 세계를 응시하고 있는 것이다. ‘돌아온 냉전 시대의 마지막 전사’ 럼스펠드. 그를 가장 주목해야 할 당사자는 한국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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