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인천서 시카고까지 20일

2001-02-07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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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은호 (약사)

해방하고 3년이 지난 1948년 여름, 한국은 첫번째로 시행하는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전국이 온통 정신없이 바빴다. 우리집에서도 큰 매형이 경기도강화의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 온 집안이 열심히 뒷바라지를 하고 있었다. 다행히 큰 매형 윤재근씨는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그후 국회의원을 4선 연임했다. 이러한 와중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대로 미국에 유학 가는 준비로 골몰하고 있었다. 우선 영어도 배워야 했고, 장학금도 얻어야 되고, 진학할 대학도 고려하여야 했다.

영어는 미군들을 사귀면서 또 정동교회에서 모이는 미군과 민간인 합동예배와 찬양대에서 같이 노래함으로 많이 배우고 도움이 되었다. 이때 같은 찬양대원으로 이화대학총장을 하신 앨리스 아펜셀러박사가 있었다. 이러한 계기로 하여 나는 아펜셀러박사를 가깝게 알게 되고 그분은 나를 귀엽게 보아 주셨다. 내가 당시 미국감리교 본부에서 주는 크루세이드 제2기 장학생으로, 나보다 나이도 위이고 사회에서나, 교육계에서나 더 똑똑하신 분들보다 앞서 제일 어린 나이에 선택된 것은 아마도 시험관의 한분이었던 아펜셀러 박사와 오랫동안 감리교회를 위하여 헌신하신 우리 아버지에 대한 감사와 경의의 결과라고 나는 믿는다.

대학도 일리노이대학 약학대학으로 정하여졌다. 이리하여 나는 미국유학 가는 준비가 되었다. 다음은 여권을 받는 일인데 그 당시 대한민국 정부가 막 수립 되었으나 아직도 정부의 기능이 미비하여, 나는 미군 군정부에서 발행한 군정여권을 가지고 유학길에 오르게 되었다.


1948년 9월 8일 나는 누군가 한테서 빌린 뚜껑 없는 트럭에 전송 나온 친구들과 가족과 함께 타고 인천항으로 갔다. 나는 단정한 양복차림이었는데, 이 양복은 한 여 선교사가 교회구호물품에서 제일 좋다고 골라서 주신 양복이었다. 그때는 아직 민간인들이 탈수 있는 비행기나 배가 없어 미군 군용 수송선에 미군들과 함께 타게 되었다.

우리가 탄 배는 인천항구를 떠나 목적지인 샌프란시스코를 향해 떠났다. 한국유학생은 남자 14명과 여자 12명으로 기억하고 있다. 나는 처음 3일은 배멀미로 꼼짝없이 벙커에 눕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가 점점 배 생활에 적응이 된 나는 때가 추석이라 다른 학생들을 동원하여 추석파티를 준비하고 우리들의 노래와 춤으로 미군들을 즐겁게 하여주며 고국을 떠나는 순간부터 싹트고 있는 향수도 달랬다. 길고 긴 항해도 어느덧 끝이 왔다.

금문교가 보이자 우리들은 환성을 지르며 기뻐하였다. 17일만에 밟는 땅이다. 부두에 내리니 유학생들 접대로 이름나신 양주은 노인부부께서 벌써 나와 우리들을 반갑게 맞아 주시고 경영하시는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으로 대접하여 주신 것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내가 미국에 와서 제일 먼저 한 중요한(?) 일은 바나나를 사먹은 것이다.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시카고로 가는데 기차로 또 3일이 걸렸다. 지금은 한국에서 미국까지 하루도 안 걸리는 공간인데, 그때에는 20일이나 걸렸으니 격세의 감을 절실히 느끼게 한다. 이렇게 하여 나의 미국생활이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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