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찜찜한 ‘법규상 어쩔 수 없는일’

2001-01-30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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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균희

한국 국적포기 절차를 밟지 않고 모국을 방문했던 미주한인1.5세가 영락없이 군대에 끌려가게된 상황이라든지, 방문차 나갔던 시민권자가 징집법에 걸려서 돌아오지 못한다는 기사를 읽으며 같은 코리안어메리칸으로서 느끼는 바가 많다. 당사자들은 "무슨 방법이 없을까요?" 하며 동동 발 구르고, 관계자들은 "법규상 어쩔수 없는 일"이라고 뒷짐지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법치국가에서는 법을 지켜야지" 하면서도 뭔가 찜찜한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다. 정부예산이 선거자금으로 유용되었다는 검찰의 조사결과에도 책임회피를 하는 의원들. 이런 엄청난 사건도 "법규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수사를 받아들이는 목소리를 들어보지 못했다. "야당탄압"이라고 투쟁을 벌이기도 하고, 이것을 조사하려면 특검제를 적용해서 지금까지의 정치자금을 모조리 조사하자고 들고 나오기도 했다. 법을 어긴 경우에도, 위법행위의 유무 판정보다는, 입씨름으로 적당히 넘길 것 같다. 세풍, 총풍, 혹은 고위공직자 자녀들의 병역면제 병역기피의혹 등이 모두 입씨름으로 넘어가버리고 말았다. 유독 모국방문한 이민자의 자녀만이 "법규상 어쩔수 없는 일" 속에 묶여 있어야하는가.

이렇게 황당한 법적용상의 문제는 LA 폭동시를 돌이켜보면 더 명확해진다. 폭도들이 상가에 불지르고 약탈하고 있었지만, 속수무책인 때였다. 주 방위군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궁여지책으로 물보다 진한 피가 뭉쳐서 한인청장년을 중심으로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자구책이 마련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들 단결하고 무장을 하고 나섰는데, 폭도들의 광란과 방화 약탈에는 무기력하던 경찰이 자구책으로 무장하고 나선 한인들의 무장해제에는 적극적이었다. 그리곤 이들을 무단총기소지로 혹은 불법총기소지 혐의를 붙여서 입건하는 사건도 일어났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의 LA 경찰도 분명히 "법규상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했을 것이다.


예외가 없는 법은 없게 마련이다. 법을 집행할때는 처한 상황을 먼저 고려해야 하는 것은 상식적인 일이다. 인정사정 볼것 없이 법을 우상 섬기듯이 집행하는 곳에서는 법이 상전이되고 인간은 법의 노예가 되어 법으로 인간을 죽이는 사건이 늘어나게 마련이다. 민주사회와는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출입국관리 공무원의 철저한 준법정신을 존중해야한다. 또 모국방문하는 우리도 한국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점에서 하등의 반발이 있을 수는 없지만, "법규상 어쩔 수가 없다"는 변병에는 여전히 씁쓸한 심정을 버릴 수가 없다. 1.5세 청년에게 적용된 법은 진작에 고쳐졌던지, 아니면 상황과 현실에 맞게 인간을 살리는 방향으로 법적용과 집행의 묘를 살렸어야 했다.

정신질환이란 있어야 할 생각은 없어지고, 없어야 할 망상이 마음속에 들어차게 되는 병이다. 마찬가지로 할 일을 하지 않는 자는,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혹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게 마련이다. 법규정의 적용과 집행도 이와 비슷하다. 의당 법을 적용했어야 할 사건에 흐지부지하면, 엉꿍한 곳에 법을 들고와서 인간을 노예화하게 된다. 이런 사회병리를 찾아서 고발하고 계몽하는 일에도 재미동포들이 한몫 해야 할때가 오는 것 같다. 정신분석용어로 전이(displacement)라는 표현이 있다. 종로에서 빰맞고 동대문에 가서 분풀이하는 식의 감정의 분출구를 찾는 것을 전이라 한다. 실력자들에게 힘을 못쓰던 법이 힘없는 미주한인자녀들에게 강력히 적용되고야마는 사회현상도 바로 전이의 일종이요, 폭도에게는 무력하던 법이 자구책을 마련한 우리동포들에게는 강력해지는것도 바로 전이현상의 일종이다. 모국을 향해서도 미국속에서도 이런 현상을 올바르게 볼수 있는 눈을 갖는 것이 우리의 특권임을 잊지말고, 한인회등 한인사회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대처할 것을 제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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