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골든스테이트의 책임회피

2001-01-30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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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시각

▶ 벌린 클린켄버그 (뉴욕타임스 칼럼)

1966년 여름 새크라멘토 교외 한 그로서리 스토어에서 목격한 여인을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담배를 피워 문 채 싸구려 보드카를 여러 병 샤핑카트에 담고 있었다. 바로 한주일 전에 아이오와에서 캘리포니아로 이사해 왔던 내게 그 여자의 모습은 너무 충격적이었다. 나는 담배를 물고 있는 모습과 그리고 보드카를 사면서도 주위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모습으로 미루어 그 여자가 이혼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이오와에서는 술은 주정부가 운영하는 판매점에서만 살 수 있었으며 이혼하는 사람도 없었고 담배 피우는 사람을 찾아보기도 어려웠다.

당시 많은 아이오와 사람들이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술이나 담배, 이혼을 위해서 이주한 것은 아니고 일자리, 온화한 날씨,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 이주했다. 끝없는 팜트리의 행렬, 솜사탕, 아보카도 외에 우리가 캘리포니아에서 느낄 수 있던 스릴중 하나가 바로 그 여인과 같은 사람들을 목격하는 일이다. 어떤 주에서는 죄악시되는 일이 다른 주에서는 일상적인 일로 간주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의 나에게 캘리포니아주는 탐욕의 덩어리였으며 죄악에 빠진 곳이었다.

그러나 그 여인의 모습만이 캘리포니아를 상징하는 것은 아니다. 네글리제 차림으로 보드카를 사고 있던 여인과 그 여인을 바라보던 소년의 모습이 함께 어우러져 골든스테이트의 사회적, 윤리적 역학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다. 캘리포니아의 역학은 바로 미국의 역학이다. 이 땅의 질서 속에서 새 출발하려는 사람들과 그 질서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어우러지는 그러한 역학 말이다. 바로 그같은 욕구와 반발로 발전기를 돌릴 수 있다면 캘리포니아주가 전력위기에 빠지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요즈음은 캘리포니아주 수퍼마켓 안에서 담뱃불을 붙이는 사람은 없다. 싸구려 보드카라도 핀란드나 스웨덴산 고급 보드카와 비슷하게 그럴 듯한 레이블을 붙이고 있다. 아이오와주에서 이주해 온 소년이 캘리포니아주에서 자라나는 동안 터득했듯이 개방된 섹스풍조 하에서 이혼은 더 이상 드문 일이 될 수 없다. 캘리포니아에 처음 이주해 왔을 때 새크라멘토 교외에도 농장이 있는 것을 보고 놀랐던 기억이 난다. 30여년이 지난 지금은 가도 가도 끝없는 집들만이 들어차 있지만.

전기는 자연을 지배하는 인간의 힘을 상징하는 에너지다. 캘리포니아주 작금의 전력위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지만 한가지 분명한 이유는 산업용이든 가정용이든 끝없는 새 출발로 빚어진 수요의 증가로 상징되는 인간의 욕심을 충족시켜 줄 힘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캘리포니아인들은 사회적 책임과 개인적 자유, 시장의 자유와 자유로운 성장 등을 내세워서 이번 사태에 스스로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으려고 한다. 이는 캘리포니아주의 속성을 잘 알고 있는 다른 서부주들을 화나게 만든다.

캘리포니아인들은 변화만을 말한다. 그들의 살아온 환경이 그렇기 때문이다. 변화의 속도가 너무나 빠르고 그 기간이 너무나 오래였던 만큼 절약의 개념은 모른다. 자신이 아껴 쓰려고 생각하기보다는 효율적인 가전제품, 전기를 덜 소모하는 주택에 맡기기를 원한다. 캘리포니아는 집단적 책임 회피의 우를 범하고 있다. 전기는 그같은 캘리포니아의 천박한 신념을 잘 비유해 준다. 전기는 항상 새롭고 신선하지만 만질 수 없고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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