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김치와 애국심

2000-12-29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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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탁제<글렌데일>

지난 20일, 우리 가족은 2박3일의 휴가여행길에 나섰다. 출발 전 음식준비과정에서 예기치 않던 작은 시비가 부모와 애들간에 생겼다. 시비의 대상은 김치였다. 나와 아내는 한사코 김치를 가져가겠노라 고집했고 두 아이들은 조금도 양보없이 반대했다. 반대이유인즉 외국인과 함께 투숙하게 될 호텔내에 김치 냄새를 풍길 우려 때문이라고 했다.

마지못한 우리는 씁쓸한 기분으로 김치를 포기했으나 앞으로 끼니를 때울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틀간 애들의 선택에 따라 이곳저곳 끌려 다니다보니 어언 작정했던 휴가는 마지막 저녁을 맞고 있었다. 저녁메뉴를 구상하던 아내가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여보, 우리 김치 먹겠다고 밀어붙입시다” 나는 말했다. “애들아, 우리는 김치를 오늘 저녁 먹지 않고는 속이 메스꺼워 병이 날것만 같구나” 단호한 어조에 애들은 단서를 붙였다. 베란다에 나가 드시라고.

랄프스 마켓에 김치가 있는 것을 아는지라 숙소에서 4마일 거리인 그곳까지 단숨에 차를 몰았다. 이윽고 김치를 손에 든 아내의 표정은 만족해 보였다.


평소에 애들이 김치를 싫어하느냐 하면 아니다. 너무 좋아한다. 우리집 메뉴는 대체로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로 투정없이 맛있게 먹기는 하나 집에 냄새가 배인다며 딸애는 연상 향수를 뿌려댄다. 애들이 김치를 견제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좋지만 남이 이를 싫어하면 조심하라”는 것이다.

호텔로 돌아온 우리는 약속대로 김치병을 끼고 베란다로 나갔다. 바닷가 겨울 촉촉한 바람이 옷깃으로 스며든다. 그러나 김치병을 마주보는 우리의 표정은 흐뭇했다. 한 젓가락 뜨거운 라면을 훌훌 불어 입에 넣고 다음은 김치 한 젓가락. 순간 우리는 같은 동작으로 입을 막았다. 우리는 우거지상으로 한동안 말을 잃었다.

김치를 뱉어낸 아내는 몹시 흥분했다. 기대가 빗나간 배신감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과장해서 아내의 김치 솜씨는 A학점이다. 아내의 김치에 맛들인 직장 상사, 동료에게 나는 수시 김치 공세로 점수를 땄다. 한 백인상사에게 선심을 쓴 김치를 맛본 동료들이 너도나도 손을 벌렸다. 어느덧 이들과 나의 인사는 ‘김치’로 통하게 되었다. 나는 아내를 ‘한국김치 대사’라고 위로해준다.

아내는 한국김치가 틀림없는지 상표를 확인해 보라고 했다. 정확히 표기된 상표는 한국김치임이 명백했다. 어중간히 먹을 수만 있었다면 접고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예사 사건으로 보아 넘기기에는 정통 한국김치의 현주소를 읽어버릴 것만 같은 우려가 앞섰다. 더더욱 묵과할 수 없는 사실은 한국 정통김치라는 상표로 미국 주류 대형마켓에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슬기와 정서를 타 민족사회에 이해시키는 수단과 방법을 쉽게 거론할 수 없겠지만 우리 고유의 음식문화야 말로 타 민족사회에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본다. 중국, 일본만 보더라도 자기 나라를 홍보하는 수단으로 고유 음식문화를 앞세워 효과를 거두었다. 이제 늦은 감이 있으나 ‘김치’의 위력을 과시해 볼만한 시점에 왔다. 진정 애국심이 듬뿍 담긴 김치, 옛 할머니의 정성어린 김치가 세계인의 사랑을 받게 될 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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