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절망에서 나를 일으켜준 이웃들

2000-12-27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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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말을 보내며

▶ 최춘식<부에나 팍>

나는 1992년 가을 한꺼번에 3가지 재앙을 당한 적이 있었다. 급작스런 B형 간염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 처한 가운데, 설상가상으로 80% 이상의 매상을 점하고 있던 주거래선이 하루 아침에 파산을 하였다는 청천벽력 같은 비보를 받게 되었다. 30분 일하고 1시간을 누워서 휴식을 취해야 하는 극한 상황에서 월남전 참전에서 얻은 뚝심을 가지고 3개월을 버티다 결국 10년을 키워 온 회사를 파산신청으로 죽이지 않을 수 없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변호사와 파산수속을 밟으려 상담한 결과 모든 부채를 면제받을 수 있다는 반가운 귀뜸을 해 주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날 저녁부터 목에 걸린 생선뼈 같이 내 마음을 괴롭히는 것이 있었다. 나 개인을 사랑하고 믿기 때문에 돈을 빌려준 가까운 사람들의 부채를 도저히 부채목록에 올릴 수 없다는 생각과 올리자는 생각 사이의 갈등이었다. 마치 길바닥에서 떨어져 있는 돈지갑을 갖게 되었을 때 느끼는 갈등과 같은 것이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그 분들을 개별적으로 찾아 파산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미리 알리고 다시 재기하여 기필코 갚겠다고 의사를 표시하고 파산에 의한 부채면제 명단에 포함하지 않기로 결심을 하고 나니 목에 걸린 생선뼈 같은 것이 없어졌다. 처음에는 멱살이라도 잡히고 망신을 당하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에 주저하기도 하였지만, 의외로 모두들 되려 “용기를 내십시오”라고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또 어떤 분은 전기료를 못내 어두운 방에서 기거하는 것을 알고, 1만달러를 기꺼이 내놓고 격려하여 주셨고, 나의 집 마당에 돈이 든 봉투를 던져놓고 지금까지 이름을 밝히지 않는 분도 있었다. 어떤 분은 자신의 사무실에 방을 비우고 전화선을 자비로 가설해 놓고 나에게 무료로 사용하면서 재기하라는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나는 최악의 상황에 처하여 봄으로써 이 세상에 아직도 착하고 사랑에 찬 사람들이 내 주변에 많이 있다는 사실만은 확실히 체험하였다. 그래서 나는 하느님께 이처럼 좋은 분들을 사귈 기회를 주신 것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8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들은 묵묵히 나를 믿는 일에 인내를 하면서 기다리고 있다.

굳이 금전적인 문제와 관련을 시키지 않더라도, 누군가 나를 믿고 기다려 주고 있다는 선물만큼 더 큰 선물이 어디 있을까. 그보다 더 큰 사랑이, 그리고 자선이 있을까. 연말을 맞아 시한부 사랑과 자선을 베푸는 일부 사람들을 보면서 나는 무척이나 운이 좋은 사나이라는 생각으로 한 해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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