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오늘 하루 이 창 열지 않음닫기

송구영신의 의미

2000-12-27 (수)
크게 작게

▶ 이기영<본보 뉴욕지사 주필>

어느덧 연말이다. 연말이 되면 언제나 세월이 빠르다는 것을 느끼게 되지만 금년은 특히 더 빨리 지나간 것 같다. 뉴 밀레니엄이니, Y2K니 하면서 떠들썩하게 새해를 맞은 지가 얼마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한해가 흘렀다니 말이다. 오래동안 기다리면서 맞이했던 2천년이기에 이 2천년이란 숫자를 뒤로 보내면서 귀중한 것을 잃어버린 듯한 아쉬움 마저 남는다.

세월이 유수처럼 흐른다는 말처럼 시간의 흐름은 붙잡아 놓거나 지연시킬 수가 없다. 그리고 유수라는 말이 어울리는 또 한 가지 성질이 있다. 흐르는 물이 모든 자취를 쓸어버리듯이 흐르는 세월은 과거를 묻어버린다. 시간이 지나면 과거는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그 기억 조차 희미하게 지워져 버린다.

이렇게 시간이 과거의 기억을 지워버리기 때문에 한해를 보내면서 망년회라는 떠들썩한 행사를 갖기도 한다. 망년회라는 말은 원래 일본의 풍습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일본에서는 약 1400년 전부터 섣달 그믐에 술과 춤으로 흥청대는 세시풍속이 있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망년회의 뿌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오래동안 일본 문화에 젖어 온 결과 망년회가 송년행사를 의미하는 말로 쓰이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망년회의 풍습은 일본에만 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서양에서도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날 밤에는 춤과 노래로 파티를 하고 「올드랭 사인」을 부르면서 새해 첫날의 자정을 맞이한다.

한국에서는 묵은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것을 송구영신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구관을 보내고 신관을 맞이한다」는 의미의 송구영신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이 송구영신은 묵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것, 즉 과거를 버리고 현재를 얻는 것을 말한다. 마치 이미 떠나 가버린 구관은 아무 영향력이 없는 것처럼 과거는 소용이 없어지고 모든 일이 신관에 의해 주재되듯이 현재가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되는 것이다.

한 해가 지나고 있는 마침 이 때에 한 연구 결과가 발표되어 흥미를 더해주고 있다. 아칸소대학 심리학과 팀의 연구에 따르면 과거를 과거사로 잊어버리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 보다 정신적 및 육체적으로 더 건강하다는 것이다. 과거의 아픈 경험을 가진 학생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과거사를 잊어버린 사람들 보다 과거의 고통스런 기억을 현재진행형으로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기신뢰도에서 떨어지고 의사를 자주 찾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시간을 통과하면서 아픔을 경험하는 경우가 많다. 그 경험은 세월이 흐른 후 아픈 과거사로 기억되는데 이런 기억은 빨리 잊으면 잊을수록 좋다는 것이다. 과거의 기억에 얽매어 있게 되면 시간상 현재인데도 불구하고 과거를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인들은 과거를 잘 잊지 못한다. 잊지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과거를 잊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다한다고나 할까. “과거에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데 그럴 수 없다” “과거 이런 일은 죽어도 잊을 수 없다” “과거에 내가 당한 일은 꼭 복수하고야 말겠다” 등등. 현재를 살고 있는지 과거를 살고 있는지 구분조차 할수 없을 정도이다.

이제 한해가 지나가는데 지나간 해는 잊어버려야 할 과거이다. 그 과거 속에서 어느 누구와 원수를 진 일이 있었더라도, 사업이나 투자의 실패로 파멸을 맛보았더라도, 또 마음 아픈 이별이나 사별, 자신의 건강 악화로 고통을 겪었더라도 그 모든 일은 과거와 함께 지나가 버렸다. 과거사는 아무리 큰 영광이나 고통일지라도 현재의 찰라만도 못하다.

그러므로 한해를 보내는 마음은 말 그대로 송구영신이 되어야 한다. 해가 바뀌면 한해 동안 영욕이 점철된 달력을 미련없이 쓰레기통에 버리듯이 과거사는 깨끗이 잊어버리는 것이 현명하다. 현재의 순간 순간을 충실하게 사는 것만이 인생을 값지게 사는 길일 것이다.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