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슬픈 크리스마스

2000-12-23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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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경석 (클레어몬트 대학원 신학 교수)

지난 2천년 동안 이 맘 때가 되면 꼭 찾아오는 분이 있다. 춥거나 덥거나 그는 매년 찾아온다. 올해도 그 분은 잊지 않고 찾아 왔다.

그분이 찾아 온 세상은 소란하기만 하다. 교회들은 교회들대로 "행사"에 여념이 없고, 기업들은 기업들대로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기세를 올리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은 계절에 맞는 소비자로서의 "의무"를 다 하기에 바쁘고 또 바쁘다.

그런가 하면 연일 강간, 살인 사건으로 전전긍긍하는 한인타운의 모습도, 정치적 절망과 경제적 위기에 갈팡질팡하는 한국의 모습도, 정치적 불확실성과 경제 침체의 예감에 불안해하고 있는 미국의 모습도, 그리고 민족, 계급, 종교간의 각종 갈등과 투쟁으로 피를 The고 있는 온 세계의 모습도, 모두 우울하기만 하다.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기쁜 소식을 믿으시오" (마가 1.15). 이 것은 해 마다 찾아오시는 예수님의 설교의 요약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사랑의 나라요, 사랑의 구체화인 용서, 화해, 나눔, 봉사, 겸허의 나라이며, 인간을 하느님으로부터 소외시키고 인간과 인간을 서로 대립시키는 모든 자만과 독선, 재물의 독점과 권력의 횡포로부터 해방된 삶을 말한다. 이러한 나라는 분명히 우리에게 회개를 요구한다. 그리고 회개하는 이에게는 그것은 참으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러기에 인생의 밑바닥에서 개방된 마음으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갈구하던 이 세상의 "보잘 것 없는 이들"에게 예수님의 선포는 기쁜 소식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선포가 모든 이에게 기쁜 소식은 아니었다. 회개하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받아드리지 않는 이에게는 오히려 "슬픈" 소식이었다 (누가 6.24-26). 하느님의 말씀에 마음을 열지 않는 교만한 이들, 권력을 휘둘러 남을 억압하는 이들, 부유하면서도 나누지 않는 이들에게는 기쁜 소식일 수 없었다. 저들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과 인간을 분열시키고 사회를 불안과 투쟁의 도가니로 만들어 놓는 요인에는 권력의 횡포, 재물의 독점, 스스로를 절대화하는 자만과 독선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하느님 나라를 수용은커녕 인정도 하지 않는다. 그리고 많은 이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준다.

올해도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찾아 오셨다. "기쁘다 구주 오셨네!" 그러나 그의 오심이 우리들에게 과연 "기쁜" 소식일까 혹은 "슬픈" 소식일까? 이 질문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살아가는 모든 종파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특히 저들을 지도하는 목회자/사목자들에게 해당된다. 신자로서 마음 아픈 얘기지만, 비신자들에게는 그리스도교는 지금 독선과 아집의 집단으로, 권력과 재물을 위한 투쟁과 분열의 소굴로 전락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반그리스도교적인 이들의 악의에 찬 비난만이 아님은 교회내에서 오래 생활한 이들에게는 너무나도 분명하다 하겠다.

한국 천주교회는 지난 12원 3일,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첫 주일에 지난 200년 동안 역사와 민족 앞에 지은 죄 일곱 가지를 공적으로 고백한 바 있다. 다른 교회들도 이런 기회에 죄를 고백하고, 무엇보다도 모든 종파들은 새로운 실천으로 다시 태어나야 할 것이다.

회개 없는 교회에 예수님의 오심은 "기쁜" 소식이 아니요 오히려 "슬픈" 소식일 뿐이다. 신나게 "기쁘다 구주 오셨네"를 부르기 전에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는지 또 그 분의 요구가 무엇인지 모든 신자들은, 특히 교회의 지도자들은, 각별히 반성하고 반성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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