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한인타운의 한 교회건물에서 운영되는 청소년센터(Heart of Los Angeles Youth)를 방문한 적이 있다. 한때 번창했던 유서깊은 교회인데 주로 백인이었던 인근 주민이 소수계로 바뀌면서 교세가 기운 전형적인 미국 도심의 교회이다. 이 교회가 몇년 전부터 부흥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 원동력이 된 것이 청소년센터였다.
청소년 센터는 아주 우연히 시작되었다. 80년대말 성가대 솔로이스트로 이 교회에 나오기 시작한 미첼 모어씨가 교회 주변을 배회하는 청소년들을 발견하고 같이 운동을 하며 친구가 된 것이 발단이었다. 너덧명 작은 운동모임은 11년이 지난 지금 수백명 청소년들이 회원으로 가입한 비영리 단체가 되었고, 모어씨는 풀타임 사무국장으로 직업을 바꾸었다. 학교에서 돌아와도 돌봐줄 사람이 없어 방황하던 인근 저소득층 가정 청소년들은 이제 청소년센터에 가서 음악, 미술, 컴퓨터, 체육등 과외활동을 하며 정서적 안정감을 얻고 삶에 대한 목표를 갖게 되었다. 아이들이 갱단의 유혹에 빠져들지 않고 ‘보통 아이’로 10대를 넘기는 것을 모어씨는 자랑스러워했다.
그런데 그에게는 섭섭한 것이 있었다.
“한인교회와 교회건물을 같이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한인부모들은 우리 프로그램에 자녀들을 보내지 않더군요. 한인교회와 합동 청소년행사를 해보고 싶다는 뜻도 전했지만 반응이 부정적이었어요”
한인교회의 반응이 왜 그런지를 그에게 설명하기는 곤란한 노릇이었다. “당신 개인에 대해 감정이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는 말만 할수 있었다. 우리가 하루 12시간 이상씩 일하며 돈을 모아 기어이 교외 중산층 거주지역으로 이사가는 이유를 드러내놓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는 “한인 커뮤니티가 보이지 않는 벽을 만들고 너무 끼리끼리만 어울리는 것 같다”는 말을 덧붙였다.
인류의 조상들이 집을 짓기 시작한 것은 언제일까. 아마도 농사법을 익혀 정주하던 무렵이 될것으로 추측된다. 비바람을 막고 짐승들의 습격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사면의 벽이 만든 공간은 아늑했을 것이다. 그런데 아늑한 인공의 공간이 강조되다보니 벽이 본래의‘보호’대신 ‘차단’이라는 역기능을 하게 된것이 오늘 우리의 현실이다. 폭풍우가 몰아쳐도 비 한방울 얼굴에 안맞는 두터운 시멘트벽 안에서 우리는 이웃을 잃고 자연을 잃어버렸다.
이스라엘과 수십년 혈전을 벌이는 팔레스타인의 청년들은 한손에 코란, 다른 한손에는 칼을 들고 시위한다. 코란으로 상징되는 종교적 신념을 지키기 위해 무력을 불사하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신앙을 위해 피를 마다하지 않는 것이 어디 이슬람교뿐이겠는가. 냉전체제가 무너진후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는 가장 잔혹하고 비참한 전쟁은 대부분이 종교분쟁이다. 종교적 신념이 너무 강조되다보니 신앙이 편견과 독선의 벽이 되고만 결과이다. 그래서 보다 나은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해야 할 종교가 증오와 고통, 불행의 원천이 되고 있다.
반면 얼마전 LA타임스가 보도한 남가주 어바인의 한 교회 이야기는 아름다웠다. 12년전부터 유태교와 건물을 나눠쓰는 어바인 그리스도연합교회가 최근 이슬람교도에게도 건물을 개방, ‘한 지붕 세 신앙’이 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이 교회 교인들은 유태교인들과 구약을 같이 공부하고, 커뮤니티봉사를 같이 하며, 담임목사가 휴가때면 유태교 랍비를 설교자로 초청한다. 종교간의 벽을 허물고 타종교에 문을 여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사랑의 손길을 널리 뻗는 행위”라고 교인들은 이해하고 있다.
성탄절을 맞아 서울 조계사 앞길에는 “예수님 오신 날을 축하합니다”라고 쓴 현수막이 내걸렸다. 아울러 조계종 서정대총무원장은 “예수님이 인류에게 몸소 가르치고 깨닫도록 한 사랑과 진리의 말씀이 불교의 대자대비의 실천과 다르지 않은 것으로 알고있다”는 성탄축하 메시지를 발표하며 자비와 사랑, 정의와 평화의 세상을 만드는데 양 종교가 협력하자고 했다. 지난 5월 부처님 오신 날에는 기독교교회협의회와 천주교 대표기관이 축하메시지를 보냈었다. 종교간 화합의 훈훈한 바람이 느껴진다.
성탄절 연휴다. 예수그리스도의 가장 큰 가르침은 민족과 계층, 성별을 넘어서는 사랑이다. 사랑의 자연스런 흐름을 막는 높은 벽이 우리 안에 있지나 않은지 살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