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법정 공방이 계속되던 대통령 선거시비가 연방대법원이 조지 W. 부시의 손을 들어 주면서 끝이 났다. 한동안 관심을 모았던 선거인단의 ‘반란’은 기권표가 있기는 했지만 대선 결과에는 영향이 없었다. 선거 후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대선 뒷이야기와 부시 행정부의 앞날을 본보 위원들의 좌담으로 짚어본다.
▲민경훈 편집위원 - 올 선거는 죽은 사람이 산 사람을 누르고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되는가 하면 퍼스트 레이디가 사상 처음 연방상원의원으로 뽑히고 112년만에 전체 유효표에서 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등 이변이 속출했습니다. 그중에서도 36일간의 법정공방 끝에 법원에 의해 대통령이 결정된 것은 사상 처음인 것 같습니다.
▲권정희 편집위원 - 표를 못 읽는 구식 검표기, 선거인단이 중간에 서는 간접선거, 카운티마다 다른 투표 시스템… 이제까지 별 말썽없이 덮여있던 온갖 문제들이 백일하에 드러난 선거였지요. 컴퓨터 시스템을 공격하리라던 밀레니엄 버그가 엉뚱하게 미국 선거를 공격했다는 농담이 나왔을 정도이지요.
▲박덕만 편집위원 - 이번 선거의 패자는 뭐니뭐니 해도 연방대법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연방대법원이 플로리다주 대법원의 수검표 명령을 5대4의 표결로 중단시킨 것부터 모양새가 좋지 않았습니다. 물론 플로리다주 대법원의 결정도 4대3의 표결로 내려져 당파색이 엿보이기는 했지만 이 문제는 플로리다주 대법원에 맡겨두었던 것이 좋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플로리다주 대법원만 진흙탕에 뛰어드는 것으로 족했다는 뜻입니다.
▲옥세철 논설위원 - 사법부의 수장격인 연방대법원도 현실 정치와 무관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준 게 이번 연방대법원의 최종 판결로 보입니다. 대법관들조차 파당적으로 갈렸다는 비판이 드센 것 같습니다.
▲민 - 연방 대법원에서 유효표를 판정하는 기준이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플로리다 주 대법원의 수검표 명령을 무효화하고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수검표를 금지한 것을 놓고 논란이 일고 있습니다. 선거인단 선거가 18일인데 굳이 12일이 마감일이라고 고집하며 수검표를 막을 필요가 있었느냐는 것이죠.
▲옥 - 그렇지만 현명한 결정으로 봅니다. 재개표를 명령한 플로리다주 대법원의 판결이 위헌이라는 데에는 9명 연방대법관 중 7명이 동의한 데 주목을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가령 대법원이 위헌을 적시하면서도 재개표를 명령했다고 했을 때 뒤따를 정치적 혼돈을 생각해 봅시다. 헌정위기로 이어지는 게 명약관화한 사실 같습니다. 아직도 대통령 당선자는 결정이 안 돼 혼돈의 안개정국은 내년까지 이어지겠지요.
▲박 - 하지만 결과적으로 대법관들에 대한 온갖 루머가 나돌고 있지 않습니까. 보수파 오코너 대법관이 ‘고어가 당선된다면 끔찍한 일’이라며 고어가 당선되면 은퇴를 미룰 것이라고 말했다는 소문을 비롯해 누구의 부인, 누구의 아들이 부시 진영에서 일하고 있다는 등 미국 정의의 최후의 보루여야 할 연방대법원 판사들이 추한 꼴을 국민들 앞에 보인 셈입니다.
▲민 - 이번 판결은 고어가 자충수를 둔 결과라는 분석도 있습니다. 처음부터 일부 지역에 국한하지 말고 플로리다 전지역에 걸쳐 일정 기준에 의한 수검표를 요구했으면 좀 더 당당했을 텐데 어떻게 해서든 자기한테 유리하게 수검표를 꿰어 맞추려고 한 것이 오히려 불리한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입니다.
▲권 - 선거직후 상황으로서는 그럴수밖에 없었지요. 투표용지나 검표기‘잘못’으로 고어지지 유권자의 의사가 개표과정에서 반영이 안되었다고 하니 서둘러 문제된 지역 재검표를 요구하였던 것이지요. 재검표 요구 법정시한이 있기 때문에 나중에는 전체 수검표를 요구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지요. 법정공방 5주동안 고어가 인심을 좀 잃기는 했어요. 너무 물고 늘어져서 얄밉다는 것이지요.
▲박 - 이번 선거결과가 흑인과 백인빈민층의 표를 의도적으로 배제시켜온 백인 보수주의자들의 부당행위를 여실히 드러내주었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20세기 초 부정선거 방지를 위해 선거제도를 개혁하면서 각 당에서 투표용지를 만들어 지지 유권자들에게 나누어주던 방식을 폐지하고 유권자가 직접 등록을 하고 투표를 하는 ‘비밀투표’ 방식으로 바뀌게 됐는데 여기에는 부정선거방지 외에 대거 몰려오는 유럽이민자들과 노예에서 자유인이 된 흑인들을 투표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개혁주도 세력의 전통을 이어온 것이 바로 공화당이며 그들은 이번 선거에서도 마이애미-데이드 카운티의 흑인들과 팜비치 카운티의 유대 노인층이 던진 소중한 표를 묵살했다는 주장입니다.
▲민 - 부시가 가까스로 대통령이 되기는 됐지만 앞으로 장래가 험난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입니다. 유효표에서 졌다는 게 꼬리표처럼 따라 다닐 것이고 흑인등 민주당 일각에서는 그의 정통성마저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입니다. 설상가상으로 경기마저 내리막길을 걷고 있어 머지 않아 차라리 떨어지는 게 나았다는 소리가 나올지도 모릅니다.
▲옥 - 의회가 갈라진 상황인 데다가 또 포퓰러 보트에서 진 대통령이 국정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많이 제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 큰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재개표 혼돈정국에서 미국민과 정치권이 보여준 자제력으로 보아 이 문제들은 극복되리라 봅니다. 이미 80%의 미국민이 부시를 대통령 당선자로 받아들인다는 여론조사결과를 볼 때 부시 차기 대통령의 정통성은 그가 하기에 달렸다는 생각입니다.
▲권 - 정통성 문제야 없겠지만 ‘부시 시대’에 대한 기대는 별로 높지가 않은 것 같습니다. 레임덕 대통령이 물러나고 새 대통령이 들어설 때면 기대감에 찬 국민이 보통 70%는 되는 법인데 이번에는 60%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세력이 비등한 공화·민주 양당이 밀고 당기다가 국정이 교착상태에 빠질 상황에 대한 우려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부시의 경험 부족이 불안의 원인인 것 같습니다.
▲박 - 부잣집 망나니 아들 이미지였던 부시가 우여곡절 끝에 대통령에 당선되기는 했지만 체니나 베이커, 파월 등 아버지 시대 노장들 틈에서 얼마나 미국을 잘 이끌어나갈지 믿덥지가 않습니다. 레이건도 8년간의 임기를 잘 마쳤는데 부시라고 못할 것은 없겠지만 실제 득표수는 고어가 더 많았다는 사실은 그가 ‘모호한’(fuzzy) 수치로 실수를 범할 때마다 국민들의 가슴에 되새겨질 것으로 보입니다.
▲민 - 그의 앞날에 대한 비관론이 강한 게 차라리 유리할 수도 있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토론 때 기대치가 낮아 중간만 하고도 이긴 듯 보였던 것처럼 작은 업적만 이뤄도 큰 일을 해낸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이야기죠.
▲옥 - 어떤 면에서 볼때 오히려 축복일 수도 있습니다. 압도적 표차로 당선된 대통령이 실패할 수 있는건 권력이 지닌 오만이라는 속성 때문입니다. 소수의 지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화해와 조정을 추구하는 자세로 국정에 임할 때 좋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는 것입니다. 부시의 경우 텍사스주지사로 민주당 다수 주의회를 상대로 타협의 정치를 한 경험이 있습니다. 대통령 당선자가 결정되기 전 한 칼럼니스트가 쓴 내용이 기억납니다. 그 자신 고어에게 투표했지만 이번 같은 분열상황에서는 부시가 더 바람직하다는 의견이었습니다. 고어보다는 부시가 화해와 타협으로 미국을 이끄는데 더 적합한 지도자라는 것이지요.
▲권 - 어쨋든 한달후면 백악관 분위기가 많이 바뀌겠어요. 상당히 차분해질 것이란 전망입니다. 클린턴은 피자시켜다 먹으며 밤늦게까지 일하는 올빼미 스타일인데 반해 부시는 초저녁이면 잠자리에 드는 스타일이라고 합니다. 힐러리와 로라 부시도 분위기가 많이 다르지요.
▲옥 - 국정면에서는 부시가 해외문제 문외한이므로 국내정책에만 집착한다는 예상이 있었습니다. 오히려 반대일 수 있습니다. 의회에서 양당의 팽팽한 대치로 주요 국내의안의 통과가 어려운 만큼 해외부문에서 돌파구를 찾을 가능성이 있다는 시각도 있어요.
▲권 - 대부분의 대통령들이 백악관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국제문제에 문외한입니다. 클린턴만 하더라도 아칸소주지사 하다 대선에 출마했으니 국제무대에 익숙할 기회가 없었지요. 92년 선거때 W. 부시의 아버지인 부시 당시대통령으로부터 “우리집 개 밀리가 외교를 더 잘안다”고 놀림을 받았을 정도입니다. 국제문제와 관련해서 우리의 최대관심은 북미관계이겠지요. 관계개선이라는 원칙자체에는 변함이 없더라도 지금같은 북한 달래기로 일관할것 같지는 않습니다.
▲옥 - 부시행정부 해외정책팀의 면면에 주목이 갑니다. 부통령인 딕 체니에서 콜린 파월, 콘돌리자 라이스, 리차드 아미티지, 폴 월포위츠에 이르기까지 ‘힘에 의한 해외정책’ 신봉자들입니다. 클린턴행정부 사람들과 대조가 됩니다. 북한에 대한 정책에도 적지않은 변화가 예상됩니다.
▲민 - 어쨋든 선거는 끝났고 죽기살기로 싸우다가 막상 대법원 판결이 나오니까 패자가 깨끗이 승복하는 모습은 미국이 아니면 보기 힘든 아름다운 장면이었습다. 규칙대로 싸우되 결과가 나오면 흔쾌히 이를 인정하는 자세야말로 법치주의의 구현이자 미국 힘의 근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박 - 나는 누구든 민주당에서 대통령이 나와야 우리 한인등 마이너리티에 유리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데 그점이 아쉽습니다. 공화당정권 하에서는 소수계에 대한 복지혜택이 축소되기 쉽고 그렇게 되면 흑인이나 히스패닉등 소수계를 고객으로 삼는 한인 비즈니스들이 타격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부시재임기간에 한인타운 경기가 위축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