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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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 송년모임 이대로 좋은가

2000-12-21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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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기제<통관사>

가을앓이를 했던 허한 마음들이 영양 보충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 12월이 기지개를 켜며 그 모습을 드러낸 첫날부터 곳곳에서 여러 모임들이 사람들을 부른다. 그 중에도 가장 우세한 모임은 역시 학연으로 기둥을 세운 동창모임이 아닐까.

한편에서는 끼리끼리 돈 낭비, 시간 낭비뿐이라고 얼굴을 찌푸리기도 한다. 그래도 길지 않은 인생여정에서 똑같은 팻말아래 3년 내지 6년을 머물렀다는 사실은 결코 가볍지 않다.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이 힘이 된다. 그래서 참석하고 싶다.

보통사람으로 살다보면 화장 곱게 하고 제일 예쁜 옷 골라 입고 가야하는 파티라고 일컬을 만한 모임에의 초대란 없다. 넉넉지 않은 여유 때문에 참가비도 공연한 객돈 나가는 것 같을 때도 있다. 더구나 경품 하나라도 도네이션 해야 할 입장이면 주춤 쉬던 사업이 눈을 흘긴다. 그래도 가고 싶은 건 세상만사 다 잊고 하루저녁 마음껏 웃어보리란 심사다.


동기끼리 모인 테이블에서 저녁식사가 끝나면 한껏 기대했던 여흥시간이다. 잘 나가는 방송인을 사회자로 초빙했으니 얼마나 웃겨줄까. 기대가 천장에 올라붙은 오색 풍선과 무리 지어 있다. 풍선 아래로 신세대 후배들이 경품표를 팔러 다닌다. 그렇게 해서 동창회 기금이 마련된다. 몇장 살 수도 있지만 난 고개를 가로젓는다. 짠 냄새를 진하게 풍기며 얼굴 두껍게 안 사고 버티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우선은 티켓 몇장 사서 앞에 가지런히 놓고 온 신경을 번호 맞추기에 여념이 없어지는 나를 보기가 싫다. 경품으로 나온 물건들이 하나씩 둘씩 빠질 때마다 아쉬움에 가슴이 쓰려진다. 따라서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 찾아 테이블을 옮겨가며 정담을 나눌 시간도 없다. 심하면 화장실도 못 간다.

경품추첨 행사의 의미와 본질을 생각해 본다. 모두가 동창들 주머니에서 나왔고 역시 동창들이 뽑아서 갖고 간다. 결국 얻은 것은 티켓을 판돈뿐이다. 그것이 얼마나 될까? 차라리 도네이션을 받아 직접 기금으로 하면 어떨까.

게다가 엄청 비싼 출연료를 지불하며 초빙하는 사회자가 진짜 필요한가. 자신이 맡아 진행하는 방송을 한번도 듣지 않은 사람 손들어 보라기에 장난삼아 손을 들었다. 잠깐 쳐다보더니 “저런 뻔뻔한 여자 좀 보게. 저런 여자는 내가 절대로 선물 안 줄꺼야”라고 한다. 참석자들을 잘 웃겼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걸 노래라고 지금 부르고 있는 거야?”“놀구 있네 놀구 있어. 그만해”

하루종일 일에 시달려, 서로에게 시달려, 누구나 피곤한 삶을 산다. 그 시달림에서 비켜나 즐겁게 웃고, 반갑게 만나고 싶어 찾은 동창회 파티에서 이런 대우나 받는다면 이듬해에 또 참석하고 싶을까?

피안대소 하고 싶다. 꼭 칭찬의 소리가 아니어도, 꼭 위로의 말이 아니어도 듣고 부담 없이 웃을 수 있고, 즐거워 질 수 있는 그런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 그립다. 들어서 상처가 될 말은 땅에 묻고 조용조용 기분 좋게 하는 말만 소유한 사람들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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