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노블레스 오블리제

2000-12-16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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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자수첩

’노블레스 오블리제’는 귀족의 의무, 즉 가진 자의 사회적 책무를 뜻하는 프랑스어다. 정치인이나 각계 인사들이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을 때 자주 등장하는데 출신성분과 상관없이 남들 위에 서서 일하는 지도자의 도덕적 의무는 시민사회를 건강하게 한다는 것이다.

어릴 때부터 워낙 병원 가기를 꺼려해 웬만하면 약이나 민간요법으로 해결해 왔고 미국에 와서는 의사 진료를 위해 약속을 해놓고도 번번이 지키지 못해 더욱 더 병원과 멀어졌다. 이런 병원 기피증(?)을 되새기게 한 건 11월부터 미국에서도 시판되기 시작한 낙태 경구약 RU-486 취재를 했을 때다.

한인 산부인과 의사에게 조언을 구하기 위해 수십 통의 전화를 걸었지만 인맥을 통하지 않고 산부인과 의사와 통화하기란 그야말로 불가능했다. 산부인과에서 근무하는 리셉션 담당이라는 산을 넘는 것이 급선무여서 한마디로 짜증스러웠다.


기자라고 밝히면 백이면 백 "우리 선생님이 너무 바쁘셔서요, 의사가 진료하기도 바쁜데 일일이 전화 받을 시간이 어디 있겠어요?"라고 톡 끊어버리고, 환자인 척 전화를 하면 마치 자신들이 의사라도 되는 양 "선생님은 진료 중이세요. 지금 임신 몇 주 되셨죠?"등 개인적인 질문공세를 퍼붓기 시작해 "이번 주는 안되고 내주 중에 방문하세요"로 끝난다.
의사도 인간이니까 진료시간 외에는 휴식을 취해야겠지만 그래도 급부상한 사회적 이슈이고 앞으로 대부분의 병원에서는 취급할 약인데 의견이나 입장쯤은 기꺼이 밝혀주는 게 좋지 않을까?

그런데 병원 데스크의 도가 지나친 고자세는 비단 산부인과뿐 아니다. 진료과목을 막론하고 병원에 예약을 하려는 상당수의 사람들이 전화를 걸고 나서는 마치 자신이 의사인양 까장까장대는 리셉션 담당자들의 ‘횡포’에 기분이 상해 투덜거리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영업을 잘하려면 비서를 구워삶아야 된다는 세일즈 전략처럼 의사의 진료와 조언을 받으려면 리셉션 담당의 비위를 맞춰야 하나 보다.
동료기자들도 의료나 건강 관련 기사를 취재하다가 코멘트를 얻기 위해 전화하면 99%가 의사와는 통화 한번 못해 본 채 리셉션 선에서 칼같이 잘리곤 한다고 불평한다. 아마도 의사 선생님들은 자신에게 신문사 기자가 전화했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하리라고 생각된다. 그 중에는 신문에 자신의 이름이나 사진이 나기를 은근히 바라는 분들도 있을 텐데 심중을 읽지 못하는 리셉션 탓에 찾아온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한가지 안심되는 것은 이처럼 철통같은(?) 방벽 탓에 경구용 낙태약이 의사 처방 없이 무분별하게 유통되진 않을 것이란 믿음이다. 진료 약속하기도 이렇게 어려운데 병원에서만 복용해야 한다는 낙태약을 쉽게 구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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