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대선 공방이 준 선물

2000-12-1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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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에세이

▶ 박봉현 사회2부 부장

대선 공방이 귀한 연말선물을 주었다.

초등학생들이 조회시간에 운동장에서 줄을 맞추려는 선생님의 "앞에 나란히" 호령에 팔을 똑바로 올린다. 그러다가 몇분이 지나면 팔이 자연스레 안으로 굽는다. 줄을 바르게 하려면 힘들어도 팔을 곧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선생님이 잠깐 한눈을 팔면 놓칠세라 슬쩍 힘을 뺀다.

한달 넘게 질질 끌었던 대선 공방이 팔은 안으로 굽게 마련이라는 평범한 말을 떠받쳤다. 그럴듯한 논리로 색칠하고 광택을 내도 바닥에 깔려 있는 본심을 감추기 어렵다는 점을 일깨웠다.


백악관 주인 자리를 놓고 다툰 부시와 고어, 그들의 지지자들은 팔을 안으로 굽히는데 지략을 모았다. 겉으론 정의와 진실을 들먹였지만 실상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만 혈안이 됐다. 불편부당의 상징인 연방대법관들도 이같은 비난을 완전히 비켜가지 못했다.

고어측은 기계가 판독하지 못한 표를 손으로 검표해야 국민의 의사가 제대로 반영되며 정부가 정통성을 얻게 된다고 되풀이했다. 그러나 수검표 대상지역이 민주당 지지자가 많은 플로리다주 3개 카운티가 아니라 보수색이 짙은 지역이었더라도 "끝까지 표를 계산하자"고 다그쳤을까.

부시측은 수검표가 부정확하고 민주주의의 절차에 위배된다며 펄쩍 뛰었다. 사전에 마련한 규칙을 선거가 끝난 뒤 고치려는 것은 부당하다는 얘기다. 항아리가 샐 것 같으면 물을 붓기 전에 고쳤어야 했다고 쏘아붙인다.

하지만 민의가 정확히 반영되지 않았다는 고어측의 주장이 공화당 지지 지역에서 제기됐더라면 "수검표 해도 좋다"며 여유를 부리지 않았을까.

고어측은 모든 표를 계산해야 한다는 원칙에 충실한 듯했다. 한데 웬일인지 공화당원이 개입돼 물의가 빚어진 한 카운티의 부재자 투표를 전면 무효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화당 표가 많았던 이 부재자 투표에서 만일 민주당 표가 많이 나왔더라도 똑같은 요구를 했을까.

부시측은 고어측이 유권자들의 결정을 따르지 않고 법에 매달려 선거결과를 바꿔놓으려고 한다고 비난했다. 하지만 플로리다 주대법이 문제가 된 표(undervote)를 수검표하라며 고어에 유리한 판결을 내리자 기다렸다는 듯 즉각 연방대법원에 상고했다. 상대방이 법에 호소하는 것을 꼬집으면서 자신의 법적 대응엔 거침이 없었던 연유는 무엇일까.

부시측은 헌정위기가 초래된다며 고어의 승복을 요구했다. 국가위기라면 남북전쟁도 있고 대공황도 있다. 이번 위기는 위기도 아니었다. 남북전쟁은 노예해방과 함께 위대한 링컨 대통령을 낳았다. 대공황은 루스벨트 대통령의 식견을 드러냈다. 고어보다 격정적이고 굴곡이 심한 삶을 살아온 부시가 위기 운운할 때 그 순도가 떨어진다. 고어에 뒤지고 있는 상황이었더라도 위기론을 앞세워 대선 공방을 마무리하려 했을까.

고어측은 공화당원인 플로리다주 총무처장관이 부시 승리를 인증하자 파당적 행위라고 공박했다. 총무처장관이 민주당원이더라도 이같이 공격했을까. 부재자 투표 무효소송을 기각한 판사가 공화당과 불편한 관계에 있는 흑인이 아니라 골수 공화당원이었더라면 또 ‘파당카드’를 꺼내지 않았을까.

어찌됐든 승패는 판가름났다. 부시와 고어, 그리고 지지자들이 벌였던 격한 싸움은 쉽게 아물지 않을 상처와 함께 좀체 깨닫기 어려운 교훈도 남겼다. 자신에 유리한 결과를 유도하려고 종종 억지를 부리는 우리의 닫힌 마음을 돌아보는 계기를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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