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고어의 앞으로 4년

2000-12-15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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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이야기, 저런이야기

“고어가 참 어려운 일을 해냈어요. TV 앞에서 그런 연설하기가 쉽지 않을텐데 표정관리를 잘하더군요”

“한쪽에서 정중하게 패배 시인하고 다른 쪽에서는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어제 보니까 미국은 역시 미국이란 생각이 들더군요”

13일 저녁 패배를 시인하는 알 고어부통령의 연설, 그리고 한시간후 대통령 당선자로서 조지 W. 부시 주지사의 선거승리 연설을 들은 한인들의 반응이다. 고어도 부시도 선거전 내내 하던 그 어떤 연설보다 13일의 연설이 가장 명연설이었다고 평가들을 한다. “써준 연설문도 제대로 못읽을까봐 참모들이 불안하다”“연설이 서툴러서 문장 하나를 제대로 끝내지 못한다”고 선거전 내내 핀잔을 듣던 부시주지사도 “대통령 당선자라는 후광이 드리워져서 그런지 의젓하고 믿음직스럽더라”는 평을 받았다.


하지만 이날 저녁 국민들의 마음을 가장 뭉클하게 했던 쪽은 역시 고어부통령. “웬만하면 양보하지 뭘 그렇게 물고 늘어지느냐”며 고어측의 집요한 소송제기에 대해 부정적이던 사람들도 고어가 막상 패배를 시인하자 숙연해지는 분위기였다. “표로 다 이기고 나서도 선거제도 때문에 패자가 되어야 하니 그 가슴이 오죽 하겠느냐”는 동정론이 인다.

너무 원통한 일을 당하면 ‘피눈물이 난다’는 표현을 쓴다. 중국 고사를 보면 눈에서 피가 나온 인물이 있었다. 화(和)라는 성을 가진 초나라의 선비였다. 화씨가 산에서 옥의 원석을 구해 왕에게 바쳤는 데 옥 감정사가 그것을 돌덩이라고 한 것이었다. 왕은 화씨가 자기를 속였다며 그의 왼발을 잘랐다. 그 왕이 죽고 다음 왕이 즉위했을 때도 똑같은 일이 반복되어 화씨는 오른발이 잘렸다. 세번째 왕이 즉위했을 때 화씨는 산속에 들어가 원석을 끌어안고 밤낮으로 통곡을 하니 나중에는 눈물이 마르고 두 눈에서 피가 흘러나왔다.

그 소문을 들은 왕이 사람을 보내 뭐가 그리 슬픈가를 물었더니 화씨는 “보석을 돌이라 하고 곧은 선비를 사기꾼이라 하니 슬프다”고 대답했다. 원석을 다시 감정하게 한 왕은 그것이 정말 옥인 것을 알고는 그 보석을 화씨의 옥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좌절하지 않고 끝내 얻어내는 승리를 화씨지벽(和氏之壁)이라고 한다.

고어로 보면 선거에서 얻은 표가 화씨의 원석에 해당된다. 분명 지지도가 높은 ‘보석’인 데 선거제도라는 감정사의 손에 넘어가니 가치 없는 것으로 판정이 난 것이다. 고어의 다음 계획이 무엇인지 관심들이 높다. 패배시인 연설의 내용을 보나, 그의 나이를 보나, 이번에 얻은 표를 보나 2004년 대선을 그냥 넘길 것 같지는 않다. 그가 다음 4년 인내심을 가지고 표밭을 다져 마침내 화씨지벽의 승리를 거둘수 있을 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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