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냉전시대 전사’의 복귀, 무엇을 의미하나

2000-12-14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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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세철 (논설위원)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요즘도 로널드 레이건 이야기만 나왔다 하면 불쾌감을 감추지 못한다고 한다. 1980년, 그러니까 20년 전의 대선 패배 후유증에서 아직 못 벗어난 탓이다.

대선서의 패배는 엄청난 심리적 고통을 불러온다. 이긴 자가 모든 것을 독식하는 게 정치판이고, 또 패배자는 설 곳이 없는 게 미국의 풍토이기 때문이다. 2000년 12월12일은 이런 의미에서 앨 고어에게 있어 ‘최악의 날’로 기억될 것 같다. 미국의 최고 법원이 조지 W 부시의 손을 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이번 대선은 고어에게 있어 상당히 억울한 선거다. ‘포퓰러 보트’에서 더 많은 득표율을 올렸다. 또 플로리다에서도 결코 진 것 같지 않다. 그런데도 고어는 패배 판정을 받았다. 또 자칫하면 개표결과에 선선히 승복하지 않고 법정으로 끌고 간 ‘꼴사나운 패배자’로 낙인찍힐 가능성도 있다. 이 점에서 고어의 패배를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하고 있다. 민주당원들이다. 진보세력이다.


이들 말고도 또 있다. 클린턴 행정부 해외정책의 수혜자들이다. 이들은 고어의 불운을 아쉬워하기 보다 부시 정권의 출범을 꺼린다는 게 더 정확한 표현 같다. 정권교체와 함께 미국의 해외정책이 그 빛깔부터 달라지는 사태를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지난 4월 조지 W 부시는 주미 러시아대사를 만났다. 부시는 당시만 해도 공화당의 선두주자에 불과했지만 차기 대통령으로 유력시된다는 판단 하에 러시아 대사가 만난 것. 부시는 한가지 메시지를 정확히 전달했다. 새 행정부가 들어설 경우 미국은 국가 미사일방위(NMD) 개발에 박차를 가할 것이라는 메시지다. 북한, 이란등 이른바 ‘깡패국가’(Rouge State)들이 장거리 미사일을 개발해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사태를 결코 좌시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확실히 밝힌 것이다.

7개월 후 재개표 시비로 정국이 한참 혼미를 거듭하고 있을 때 부시가 조각과 관련해 제일 먼저 공개적으로 만난 사람은 콜린 파월과 콘돌리자 라이스였다. 이 두 사람은 국무장관과 안보담당 보좌관에 기용이 확실시되는 인물들이다. 대선 레이스 기간에 부시는 해외정책에 대해 언급을 자제해왔다. 개표 결과 당선이 확실시되면서 다른 면모를 보였다. 안보 및 해외정책팀 조각에 우선적으로 착수함으로써 미국의 안보 확립에 조금도 허술히 하지 않을 것이라는 시그널을 국내외적으로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와 관련해 관심을 끌고 있는 게 부시의 해외정책팀 인선이다. 클린턴 행정부의 주요 인맥은 변호사나 인베스트먼트 뱅커 출신으로 형성된 데 반해 부시 행정부의 해외정책팀 인맥은 펜타곤 출신이 주류를 이룬 것. 부통령 후보 딕 체니는 전 국방장관이다. 파월은 합참의장 출신이다. 안보 관련 주요 포스트에 기용될 게 확실한 리처드 아미티지, 폴 월포위츠 등도 레이건 및 아버지 부시 행정부 시절 국방부를 주름잡았던 인물들. 이들은 동서냉전을 이겨냈고 또 걸프전쟁을 승리로 이끈 역전의 용사들이다. 이 ‘냉전시대의 전사들’이 일제히 되돌아올 예정이다.

실무의 주요 포스트도 역시 펜타곤 출신이 차지할 것으로 보인다. 국무부 동아시아 차관보로 유력시되는 인물은 제임스 켈리. 해군출신으로 레이건 행정부 때 국가안보 보좌관을 지내기도 했다. 국방부 아시아정책 차관보로 예정된 인물은 토클 패터슨. 역시 해군 출신으로 아버지 부시 행정부시절 국방부의 요직을 거친 인물이다.

이 펜타곤 출신들은 이른바 ‘깡패국가’들에 대해 한결같이 강경한 입장이다. 월포위츠 같은 사람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을 타도하기 위해 이라크의 반체제 망명세력을 지원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북한에 대한 입장도 강경일변도다. 아미티지는 북한에 유화적인 클린턴 행정부 정책을 앞장서서 맹렬히 비난해온 인물.

보수파인 공화당은 원래 북한을 불신한다. 또 600억달러 규모의 국가 미사일방위계획은 반드시 밀고 나가야겠다는 게 공화당 입장이다. 이런 입장이니 만큼 북한에 대해 철저한 상호주의를 요구한다. 퍼주기만 하는 일방적인 시혜란 있을 수 없다. 거기다가 아시아담당 주요 실무 포스트는 물론이고 해외정책의 톱 포스트를 펜타곤 출신들이 모두 장악할 기세다. 그러므로 부시의 집권과 함께 미국의 북한정책이 대수술을 받는다는 것은 단지 수순문제로 보인다.

부시의 승리에 북한은 적지 아니 당황하는 눈치다. 고어의 불운에 실망하고 있는 사람이 한국에도 적지 않은 것 같다. 한-미 관계에, 미-북 관계에 만만치 않은 파장이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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