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화가들의 위조 지폐

2000-12-12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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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여성<화가>

화가들이 경제적으로 궁핍해지면 물감통을 끌어안고 세상을 한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막노동을 하면서 끈질기게 그림 그리기를 멈추지 않는 사람도 있지만 약삭빠른 화가들은 대중이 좋아하는 예쁜 그림을 그려 싸구려 화상에 넘겨주어 호구지책을 삼기도 하는데 이를 가리켜 위조지폐를 그린다고 한다.

때론 화가의 양심을 팔아먹고 대중을 속이는 일이라 하여 동료 화가들이 대포잔도 나누려 하지 않으며 왕따 시키기도 하는데 뉴욕의 엔디 워홀(1928~87)은 아예 1달러짜리 지폐를 캔버스의 끝에서 끝까지 반복되게 100장, 200장씩 그려내어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쥐고 ‘팝 아트’의 거장이 되었다.

같은 방법으로 미국인들이 매일 아침 대하는 ‘캠블 토마토 수프’ 통조림을 대형 캔버스에 수도 없이 반복시키고 허리 잘룩한 ‘코카콜라’ 병을 200여개 나열하기도 하여 ‘코카콜라’는 미국 대통령도 마시고 ‘마릴린 몬로’도 마시고 ‘엘비스 프레슬리’도 마시고 나도 마신다는 공감대를 형성하면서 미국인의 신분 상승에 일조를 한다.


지금까지 야수파나 입체주의, 추상표현주의 등 어려운 미학에 주눅 든 문화에 목마른 대중들과 신흥 재벌들의 환영을 받게 되는데 현대문명의 가장 진부하고 저속한 광고물일지라도 캔버스에 옮겨지면 또 다른 의미의 예술적 가치를 찾을 수 있다는데 공감한 것이다.

1962년 8월 섹스의 심볼 ‘마릴린 몬로’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가장 인기 있는 할리웃의 여배우가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세계가 경악했을 때 워홀은 그녀의 초상화를 코카콜라나 수프 통조림처럼 나열시키며 노랑머리, 연두색 눈썹, 핑크색 입술로 실크 스크린하면서 약간씩 빗나가게 찍어놓아 직접 그린 것처럼 보이게 하면서도 섹시함을 강조하려 했는데 영원한 성의 우상을 구경하기 위한 워홀의 개인전은 발디딜 틈이 없었다던가.

마릴린 몬로가 여성의 섹스 심볼이었다면 엘비스 프레슬리의 다리 떨며 노래 부르는 모습이야말로 남성적 성의 우상이었겠는데 워홀은 자신과 전혀 관계 없는 대중의 스타들을 끌어내어 자신의 그림에 재연함으로 마릴린 몬로나 엘비스 프레슬리 보다 더한 명성을 얻는데, 위조지폐를 그려보려면 이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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