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마이너리티 컴플렉스에서 벗어나야"

2000-08-15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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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대석`

▶ 올림픽 다이빙 금메달리스트 새미 리

한인 2세 가운데 로울모델을 꼽으라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사람이 새미 리(80)다. 프레스노에서 태어나 LA에서 자란 그는 48년 런던 올림픽 52년 헬싱키 올림픽에서 다이빙 10미터 플랫폼 부문 금메달을 따낸 올림픽 영웅이며 USC의대를 졸업한 의사다. 현역에서 은퇴한 뒤에도 그렉 루가니스등 후진양성과 의사직업을 성공적으로 병행한 그는 현재 중국계 부인 로즈 리와 함께 오렌지카운티 헌팅턴비치 자택에서 말년을 보내고 있다.


- 미주한인사회는 이민 100년을 맞는동안 많은 발전과 변화를 했다. 닥터 리가 자랄적 남가주 한인사회를 지금의 남가주 한인사회와 비교하면 어떻게 다른가.
▲우리가족이 처음 오렌지카운티에 왔을 때 한인이라고는 이씨 성을 가진 농부 한사람 뿐이었다. 그는 영어를 못했기에 우편이 온 것을 한꺼번에 모아 가져오면 한국말로 번역을 해주곤 했다. 우리 어린 시절에는 남가주에 있는 한인들 얼굴을 모두 알고지낼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남가주 어디서나 돌멩이를 던지면 "아야!"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한인이 많아졌다.
내 누이 달리와 메리 숀은 간호사와 교사가 되길 원했는데 주위에서는 "대학을 나와 봐야 동양여자가 간호사나 교사가 될 수 없을 것"이라며 만류했으나 아버지는 "공부만이 인종차별에서 벗어나는 길"이라며 옥시덴탈 컬리지에 보냈다. 나의 아버지와 나, 그리고 내아들 새미 2세와 딸 파멜라등 모두 그곳을 나왔다. 내손자들도 그곳을 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아버지가 다닐때는 학생수가 200~300명 내가 다닐때는 800명 정도였는데 작은 학교지만 학구적이고 의예과가 우수했다.
그당시 한인에게는 농장노동자, 그로서리스토어 점원, 중국음식점 웨이터등의 일자리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직업선택에 제약이 없다.

-부친이 상당히 깨었던 분인 것 같다. 부친의 가르침중에 기억나는 것이 있는가.
▲아버지 이순기씨는 1905년 미국에 와서 1907년에 옥시덴탈에 입학했다가 한일합방이 된 1910년에 졸업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어른을 공경하라’, ‘가족의 명예를 해치는 일을 하지말라’ 그리고 ‘커뮤니티가 자랑스러워 할 인물이 되라’고 가르쳤다. 언젠가 어렸을 때 상점에서 장난삼아 자물쇠를 한 개 훔친 적이 있었다. 아버지가 그사실을 알고서 "미국인들이 한국사람은 모두 도둑이라고 생각해도 좋으냐"고 내게 묻고 되돌려주라도 했다. 그후 나는 다시는 남의 물건에 손을 댄 적이 없다.


-어릴적에 자신이 한인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는가. 한인으로서의 민족감정을 가지고 있었나.
▲4살 때 만세사건(3.1운동)에 대해 아버지로부터 들었다. 한국을 점령한 일본인들이 독립을 요구하는 한국사람들을 잔혹하게 살해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다음날 부엌칼을 들고 이웃에 살고있던 일본계 미세스 와타나베를 찾아가 죽이겠다고 외쳐 한바탕 난리를 피운적이 있다. 하일랜드팍 초등학교 시절에는 학교 전체에 나와 누님이 유일한 동양인이었는데 어느날 일본인 학생이 전학왔다. 이사구치라는 치과의사의 아들이었는데 내가 "너 일본 아이지"하고 물었더니 그렇다길래 "나는 코리안이다" 하면서 얼굴에 한방 날렸다. 그 벌로 한달동안 학교 런치테이블 청소를 했었다. 서툰 반일감정이었던 셈인데 2차대전때 재미일본인들이 부당하게 격리수용되는 것을 보고 그같은 감정을 버렸다.

- 다이빙선수가 된 계기는 무엇인가.
▲베를린 올림픽에서 손기정선수 마라톤 우승 소식을 듣고 올림픽 챔피언이 되기로 마음 먹었다. 내게 적합한 종목을 찾다가 다이빙으로 결정했는데 아버지는 공부를 소홀히 하지않고 반드시 의사가 된다는 조건을 내세워 허락했다. 그당시는 인종차별이 심해 YMCA풀 조차 유색인종은 날을 정해 1주일에 하루만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연습하는데 애를 먹었다. LA시 챔피언이 되고난 다음에도 주위에서는 "유색인종인 너를 미국대표로 올림픽에 내보내 주겠느냐"며 말렸다.

-의사와 다이빙 금메달리스트 커리어를 동시에 추구하기가 힘들지 않았는가. 보통 사람은 그중 한가지만도 성취하기 어렵지 않은가.
▲원래 전투기 조종사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아버지가 조종사가 되면 전쟁이 끝나고 난 다음 다시 차별받는 마이너리티 신세로 돌아가지만 의사가 되면 항상 존경을 받는다고 의과대학에 가라고 했다. 43년 아버지가 돌아가시던 해 USC의대에 진학했는데 동양인이라고는 제임스 리라는 한인 학생과 나 그리고 중국인 1명등 3명뿐이었고 유태인이 6명이었는데 USC사상 가장 많은 마이너리티 학생이 입학했다고 떠들석 했다.
사실, 올림픽 금메달을 따고자 노력한 것이 공부에도 많은 도움이 됐다. 운동을 통해 ‘포기하지 않는다’는 정신을 배웠다. 나는 그다지 머리가 뛰어난 편은 아니다. 남들보다 3배는 공부를 해야했다. 내가 의과대학 공부할 때는 전시였기 때문에 4년 과정을 2년9개월로 단축시켜 강의를 했다. 그래서 더 쫓아가기가 어려웠다.
당시 타잔의 주인공 자니 와이즈뮬러와 주말이면 인근 군부대를 방문해 시범 위문경기를 펼치곤 했는데 그덕분에 첫해 2과목에 F,또 한과목이 D-가 나왔다. 그래서 부학장에게 불려가 "자원입대를 하라"는 권유를 받았다. 지금 그만두고 군에 입대하면 전쟁이 끝난후 복학 할수 있지만 유급을 하면 끝장이라며 겁을줬다. 집에 돌아가니 벌써 소문이 퍼져서 어머니가 울고 계셨다. 이래서는 안되겠다고 이를 악물었다. 다음날 부학장에게 가서 학업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주위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공부한 끝에 결국 시험에 패스했다.

-고 이승만대통령과는 각별한 사이였던 것으로 알려졌는데…
▲아버지와 이박사는 친구사이였다. 미군의관으로 53년~55년 한국에 근무했는데 경무대를 찾아가 "이순기씨 새끼"라고 자신을 소개했더니 이박사가 눈물을 흘리며 나를 껴안았다. 이박사는 나에관한 신문기사를 스크랩해두고 있었다. 55년 미국으로 돌아와 가든그로브에 정착을 했는데 이박사가 다운페이에 보태라고 얼마의 돈을 보내왔다. 67년 하와이 망명중에 한번 찾아가 만났는데 당시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도 내 얼굴을 알아봤다.

- 한인청소년을 위한 모델상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자신이 로울 모델중 한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한인청소년들에게 "새미 리는 나와 같은 코리언 아메리칸, 새미 리가 이룩한 일이라면 나도 이룩할 수있다"는 긍정적인 생각을 심어주었다고 자부한다. 한인을 포함한 모든 청소년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술, 담배, 마약 그리고 ‘마이너리티이기에 안된다’는 부정적인 생각에서 벗어나라는 것이다. 1984년 WHOSAY상을 만들어 다이빙 선수,코치등을 대상으로 매년 1000달러의 장학금을 주고있는데 술,담배,마약을 안하는 사람으로 자격을 제한하고 있다. 백인들이나 다른 아시안들의 경우는 안그런데 젊은 한인청년들이 담배 피우고 술 마시는 것을 보면 화가난다. 피는 물보다 진하기 때문인 것 같다.

-은퇴후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있나
▲테니스를 하다가 힘이들어 골프로 전환했다. 한때 25정도까지 쳤는데 현재 핸디캡은 31정도다. 그러나 2년전 손자를 본뒤로는 ‘손자 버릇을 나쁘게 만드는 재미’에 몰두, 골프를 좀 게을리하고 있다. 아들 새미 2세는 베벌리힐스 경찰서에서 사전트로 있고 딸 파멜라는 IBM에 근무하고 있다.

박덕만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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