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파란만장한 학창시절

2000-08-12 (토)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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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기행

나의 학창시절은 실로 파란만장했다. 월남 후 국민학교 5학년에 들어갔어야 했으나 4학년에 편입돼 다녔다. 곧 6·25사변이 터졌고 온 가족이 목적지도 없이 한강을 건너 무조건 남쪽을 향해 걸었다.“우리는 월남 가족이니 인민군에 잡히면 목숨을 부지 못한다”던 아버님 말씀이 생각난다.

괴나리봇짐 한 개씩 메고 기다려주는 사람도 없는 곳을 헤매다 큰 형님이 자리잡은 진해에 정착했다. 인천상륙 후 서울로 돌아왔다가 다시 부산으로 피난 가 초등학교를 마쳤다. 그때가 1951년, 중학교 진학생들에게 국가시험이 시작된 해였다.

부산에서 중학교에 입학했지만 졸업은 환도 후 서울서 했다. 고등학교를 나와 한국외국어대학 독일어과에 진학했는데 그때 나의 꿈은 독일에 유학 가서 법철학을 연구하고 돌아와 교수가 되는 것이었다. 1959년, 공부를 잠시 중단하고 입대, 미 군사고문단에서 1년 반 복무했다. 제대 후 국제 입양기관인 홀트 아동복지원에서 홀트씨 비서로 일하며 학교에는 등록만 해놓고 시험 때만 겨우 얼굴을 내밀었다. 고학하며 근근히 대학을 졸업한 바로 그 해에 또 정부가 학사자격 국가고시 제도를 시작했다. 나는 미국유학 자격증을 갖고 있었으므로 시험을 치를 필요가 없었다. 졸업 2~3년 후 학사 학위증이 우편으로 배달됐던 일이 지금 생각난다.


대학 졸업 직후인 1962년, 테네시주 수도 내쉬빌로 건너왔다. 내가 유학한 그곳의 ‘George Peabody College for Teachers’는 남한에서는 꽤 알려진 사범대학이다. 이 학교에서 학·석·박사 학위를 모두 취득했는데 박사과정 연구가 바로 북한교육에 관한 것이었다. 이것이 훗날 내가 북한을 자주 드나들게 된 또 하나의 이유이다.

당시(1962년) 남한의 GNP는 1인당 70달러도 못됐다. 집에서 등록금을 조달받는다는 것은 큰 부잣집 자녀가 아니고는 거의 불가능했다. 나는 집에서 돈을 가져오는 것을 반대했으며 집 형편도 돈을 보낼 처지가 못됐다. 부끄럽지만 내가 내쉬빌 비행장에 내렸을 때 주머니에는 단돈 5달러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미국 도착 첫날부터 일을 찾아 다녀야했고 한국에서처럼 고학으로 학사~박사 과정을 마쳤다. 회상컨데 건강마저 없었다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다.

이제 30여년 교편을 잡아온 대학에서 은퇴를 생각하며 많은 사람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복 바친다. 먼저 나에게 기회를 준 미국사회, 특히 나를 고용해 주고 격려해준 교수, 교직원들에게 감사하고 싶다. 내 인생의 동반자인 아내에게도 많은 빚을 진 사람이다. 미국 사회에 인종차별, 성차별, 계층 차별이 엄존하고, 그로 인한 개인 및 사회 문제가 많이 유발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반면에 미국 사회만큼 모든 사람에게 기회를 안겨주는 사회는 지구상에 달리 없다고 나는 단언한다.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독자들은 의아할 것이다. 내가 Peabody에서 고학하며 학자금이 모자라 전전긍긍하고 있을 때 뜻밖의 돌파구를 찾았다. 미국 교육청(Office of Education)이 나에게 북한 교육을 연구하도록 약 3만달러의 연구비를 지급해준 것이다. 지금은 큰돈이 아니겠지만 1966년의 3만달러는 큰돈이었다. 보통 새 자동차 한 대가 2천달러 정도였으니까 지금 가치로 30만달러는 좋이 될 것이다.

이렇게 미국정부의 재정지원을 받으며 나는 북한의 교육을 연구했고 1969년에 “1945년이래 공산주의 치하의 북한교육에 관한 연구”라는 제목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북한은 나의 고향이면서 동시에 나의 학구적 대상의 본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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