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젠 내가 나를 믿을 수가 없어”

2000-08-12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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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자의 세상읽기

▶ 권정희 편집위원

몇년 전 한국의 일간지에 재미있는 기사가 실렸다. 인천에 사는 한 회사원이 차를 몰고 집으로 가던 중 ‘돈벼락’을 맞은 내용이었다. 앞에서 달리던 승용차에서 수표와 돈 다발이 날아와 줍고 보니 400여만원이 되었다. 이 착한 사람은 즉시 파출소로 가서 신고를 했고 경찰은 범죄행위 후 추적을 받던 범인이 돈을 버리고 달아난 것으로 보고 수사에 나섰다. 여기까지는 뭔가 흥미진진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4시간쯤 후 교통방송을 들은 돈 주인이 나타나면서 경찰은 맥이 빠졌다. 사연인즉 안양에 살던 이 사람은 이날 인천으로 이사를 가던 중이었다. 집주인에게서 전세금 2,000여만원을 받아 부인에게 넘겨줬는데 이삿짐 챙기랴 아기 챙기랴 정신이 없던 부인이 돈 봉투를 승용차 지붕 위에 놓고는 깜빡 잊어버린 것이었다. 인천에 다 가서야 “아차, 돈 봉투!”했지만 그땐 이미 여러 사람에게 돈벼락이 내리고 난 후였다.

건망증이 이 정도면 곤란하지만 나이 들면서 동병상련의 푸근함을 나누게 하는 이슈가 건망증이다. 40대 이후 연령층이 모인 자리에 가면 빼놓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건망증 경험담이다. “이젠 내가 나를 믿을 수가 없어”라고 누군가 입을 떼면 너도나도 그간의 건망증 이야기들을 하며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진다. 건망증은 평범한 개개인을 코미디의 주인공으로 만들기 때문에 특별한 피해가 없는 한 재미있을 수밖에 없다. 40대 후반 주부의 고백.


“밖에서 음식 타는 냄새가 나서 창문을 다 닫았어요. 그런데 문을 닫고 난 후에도 냄새가 계속 들어오는 거예요. 아무래도 이상해서 살펴보니 우리 부엌에서 음식이 타는 것이었어요”
한 주부는 손님을 초대해 놓고 망신을 당했다.

“밥을 앉혀두고 다 됐나 봤더니 솥이 냉랭해요. ‘조리’버튼을 누르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버튼을 눌렀는데 잠시 후에 보니 또 그대로예요. 누르려고 생각만 하고 안 눌렀나 보다 싶어 이번에는 분명하게 눌렀지요. 그리고 손님들이 도착해 밥을 푸려고 뚜껑을 열었는데 생쌀만 가득한 거예요. 쌀에 물 붓는 걸 잊어버렸던 것이지요”
건망증이 유난히 심한 한 남자가 한국에 가는 부인을 공항에 데려다 주는 날이었다.

“아내가 이것저것 가져가는 게 많더군요. 짐들을 다 싣고 비행기 시간 맞추느라 부지런히 공항으로 갔지요. 공항에 도착하고 나니 ‘아차, 아내를 안태웠구나’ 생각이 나더군요”

인간의 기억능력은 20대 초 피크에 이르다가 차츰 저하돼 40대 후반 큰폭으로 떨어지고, 70대가 되면 20대의 절반 수준이 된다고 한다. 건망증으로 우리가 웃을 수 있는 것은 나이 들면서 나타나는 자연스런 노화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기억력 감퇴를 마냥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만은 없다. 정도가 심해지면 자괴감이 생기고 생활에 자신감을 잃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건망증을 예방할 수 있을까. 누가 가장 건망증이 심한가를 보면 대답이 나온다. 건망증이 특히 심한 사람은 가정주부, 그리고 성격이 느긋한 사람이라고 한다. 이 두 그룹의 특징은 신경을 집중하거나 흥분할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집안에서 살림 사는 주부들은 일은 많지만 단순노동이어서 머리를 쓰거나 지적 자극을 받을 기회가 적고 성격이 느긋한 사람은 세상에 흥분할 일이 없다. 자극과 흥분 없는 삶, 그것이 문제다.

기억에는 단기기억과 장기기억이 있다. 단기기억은 방금 들은 전화번호나 사람이름 같은 정보를 기억하는 것으로 우리가 쉽게 까먹는 것들이다. 어떤 정보가 단기간 있다가 증발해 버리느냐 장기기억으로 남느냐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인은 감정이라고 한다. 사랑이나 증오, 감정적 흥분이 얽힌 정보는 장기기억 영역 속에 깊이 자리 잡아서 세월이 흘러도 좀처럼 없어지지 않는다. 연애시절의 추억 같은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뇌세포가 노화했는데 삶마저 그 날이 그 날 같아서 도무지 흥분할 일이 없을 때 기억력은 저하된다. 신경 써서 기억할 만한 일이 없는 것이다. 삶에 뭔가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는 것, 그래서 매일 아침 일어나면 새 날에 대한 기대와 흥분이 있을 때 건망증은 쉽게 접근하지 못한다. 끝으로 건망증과 알츠하이머 구분법. 열쇠를 어디에 두었는지 생각이 안 나는 건 건망증, 열쇠를 들여다보며 무엇에 쓰는지 모를 때는 알츠하이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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