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배우자의 존재 가치

2000-08-09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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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요칼럼

▶ 이 철 <주필>

최근 두달동안 주변에서 배우자상을 당한 사람이 자주 생겨 상가를 들락거리다 보니 평소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여러 이야기를 줏어듣게 되었다.

얼마전 부인을 비명에 잃고 슬픔에 잠간 마켓주인이 “장사하느라고 결혼 30주년 여행을 미룬 것이 제일 한이 된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여행을 떠나려면 굉장한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은 바로 이런 케이스를 두고하는 말이다.

죽음의 특징은 경험해본 사람이 없다는 것, 그리고 예고없이 찾아 온다는 점이다. 물론 “당신은 앞으로 몇달밖에 못살 것이요”라고 의사로부터 선고받는 환자도 있지만 이경우 병을 알게된 것을 죽음의 한 과정으로 치면 예고없이 찾아온 것이나 마찬가지다. 자신이 몇년몇월에 암을 앓을 것이라고 예측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느날 갑자기다. 나이먹으면 ‘시간있을때’ 여행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을 내서’ 여행해야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에베레스트 정상의 날씨처럼 내일을 예측할 수 없다.


배우자를 잃었을 때와 자식을 잃었을 때의 충격은 전혀 다르다. 자식이 죽었을 때는 부부가 서로 슬픔을 나눌수 있고 위로해줄수 있다. 그러나 배우자를 잃었을 때는 모든 슬픔을 혼자 져야 한다. 자식이 위로해주기는 하겠지만 그것은 부부간에 나누는 슬픔과는 질과 양이 다르다. 자식은 자기의 입장에서 부모잃은 것을 슬퍼하기 때문에 부부가 짝을 잃은 것에 대한 충격에 대해 이해하기 힘들다.

더우기 참기 힘든 것은 부부중에 누구 한사람이 먼저 죽으면 그날부터 부모로서의 위엄이 사라지고 ‘보호받아야 할 사람’의 이미지를 지니게 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남편이 살아있을 때는 부인이 자녀들에게 이래라 저래라 큰소리 쳐도 먹혀 들지만 남편이 죽은 다음부터는 ‘어머니의 말’이 먹혀 들지가 않는다. 오히려 자녀들이 어머니한테 ‘이렇게 하세요. 저렇게 하세요’하고 줏대있게 나오게 된다. 부인을 잃은 남자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부인 살아 생전에는 위엄있어 보이던 아버지가 하루아침에 자식들 눈에 불쌍한 어른으로 비쳐 피보호자의 입장으로 떨어지게 된다. 자식들도 이럴진대 친척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배우자를 잃는다는 것은 힘의 역학에서 2-1=1이 아니라 2-1=0의 등식을 갖는다.

배우자를 잃으면 사회적인 위치도 달라진다. 이제까지 XX회장의 부인이었고 사모님소리도 들었으나 남자가 죽으면 여자의 사회적인 ID가 없어진다. 모임에서 초청하는 일도 별로 없고, 누구한테 전화메시지 남겨 놓았는데 회답이 없으면 인격을 무시당한 것 같은 컴플렉스에 빠지게 된다.

남자도 마찬가지다. 부인이 없으면 어디서 오라는데도 별로 없고, 남들 보기에 구질구질하고 몸에서는 홀아비 냄새가 나는 것 같은 인상을 주게 된다. 혼자 사는 어떤 여성은 집에 세일즈맨의 전화가 걸려오면 “그건 남편과 의논해봐야 될 문제인데요”라고 말하면서 전화를 끊는다고 한다. 이유는 여자 혼자 산다는 것을 알면 상대방이 엉뚱한 짓을 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부부가 건재할 때는 부부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파워를 모른다. 그러다가 한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그때 “아, 내가 잘나서 이렇게 살아온 것이 아니로구나”를 실감하게 된다.

당장 오늘부터 남편이 없다고 생각하고 행동해보면 느끼는 것이 있을 것이다. 차가 고장나면 직접 딜러에 가져가 보고 하수도가 막히면 전화번호부를 찾아 연락해보고 차고 문이 고장나면 어디에 연락해야 할지 고민해 볼 일이다.

남자쪽에서는 아내가 없다고 생각하고 시장보고 밥과 반찬 만들고, 세탁물을 정리해보면 자신이 무엇을 게을리 했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은 배우자에 대한 관심이다. 좀 방정맞은 소리같지만 배우자의 소중함을 알기 위해 “나의 남편이 내일 죽는다면…” “나의 아내가 내일 죽는다면…”을 한번씩 외워보는 것도 부부관계의 새 그림을 그리는데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없어봐야 비로소 알게되는 것이 배우자의 존재가치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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