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LPGA와 ‘베이브’

2000-08-08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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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츠칼럼

▶ 박덕만(편집위원)

LPGA에서 활약하는 한인선수가 올해는 정규멤버만 5명에 대기선수를 더하면 10명이 넘는 대군단을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박지은의 ‘캐시 아일런드’대회 1승외에는 더 이상 승전보가 없어 한인 골프팬들을 안타깝게 만들고 있다. 더욱이 시즌이 종반으로 접어든 시점에서 지지난주에는 박세리가, 지난주에는 장정이 선두권으로 마지막 라운드에 돌입했으나 뒷심이 달려 주저앉고 말아 아쉬움을 더해주고 있다.

98년 ‘루키 센세이션’의 박세리, 지난해 ‘땅콩파워’ 김미현에 이어 올해는 ‘어메이징 그레이스’ 박지은이 3년연속 신인왕을 노리고는 있지만, LPGA는 결코 만만하게 볼 상대가 아니다. 올해로 창설 50주년을 맞은 LPGA가 오늘의 위상을 이룩하기까지는 수많은 선배들의 피와 땀이 있었다는 사실을 한인선수들도 명심해야 한다.

LPGA 탄생은 ‘베이브’ 자하리아스라는 선구자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자하리아스의 본명은 밀드레드 디드릭슨이다. 노르웨이계 이민2세로 1914년 텍사스에서 태어난 그녀는 ‘여학생은 얌전히 공부만 하고 있어야만 했던 시절’ 만능 스포츠우먼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테니스에서 농구, 배구, 야구, 수영, 육상 심지어 당구에 이르기까지 못하는 것이 없었고 손대는 운동마다 최고의 기량을 보였다. 그녀의 별명 ‘베이브’는 야구시합에서 남학생들보다 홈런을 더 멀리, 더 많이 날린다고 해서 홈런왕 베이브 루스의 이름을 따 붙여진 것이다. 자하리아스는 1932년 LA올림픽에 참가, 투창과 80미터 허들에서 금메달, 높이뛰기에서 은메달을 땄다. 하도 운동을 잘하니까 "여자가 아니라 남자가 아니냐"며 성검사를 해보자는 소리까지 나왔으나 레슬링선수였던 조지 자하리아스와 결혼함으로써 그같은 루머를 가라앉혔다.


자하리아스가 골프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1933년이었는데 하루 1,000개의 볼을 때렸으며 양손에 피가 나도 연습을 그칠줄 몰랐다고 한다. 그같은 노력 덕분에 5피트5인치에 145파운드 체격의 여자인 그녀가 당시로서는 남자 골퍼들도 힘들었던 250야드 이상 드라이브샷을 날렸다. 1947년 자하리아스가 브리티시아마오픈등 그해 열린 17개 대회를 모두 휩쓸어 버리자 USGA가 나서서 그녀가 아마추어 자격이 없다고 판정했다. 그후 우여곡절 끝에 아마자격을 회복했다가 정식으로 프로가된 것은 1948년이었다.

1950년 자하리아스는 다른 12명의 선수들과 함께 ‘그들만의 리그’를 만들었다. LPGA의 탄생이다. 자하리아스의 매니저가 투어의 매니저 역할도 했다. 첫해 14개대회가 열렸고 총상금은 5만달러였다. 지금은 총상금이 100만달러가 넘는 대회도 많고 지난번 카이 웹이 우승한 US여자오픈 우승상금은 50만달러에 달했지만 1950년 자하리아스가 자신의 두 번째 US여자오픈 우승으로 받은 상금은 1,250달러에 불과했다.

50년대, 60년대 초창기 LPGA는 오늘날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통신수단도 제대로 없었고, 지금처럼 항공편이 발달돼 있지도 못했다. 그래서 투어에 참가하는 약 50여명의 선수들이 포드나 셰비 승용차에 클럽을 싣고 이 도시에서 저도시로 캐러반행렬처럼 다녔다. 때로는 다음대회 장소까지 거리가 1,000마일이 넘기도 했는데 도중에 누가 타이어 펑크나 고장이 나면 모두들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 투어 재산목록 1호인 스코어보드는 차지붕위에 매달고 다녔다.

대회장에 도착하면 선수들은 골프클리닉을 개설하거나 프로암대회를 통해 돈을 모금했다. 거기서 걷힌 수익금이 곧 골프대회의 상금이었다. 마치 약장사가 모자를 돌리는 것과 같은 분위기였다. 코스에 요즈음처럼 로프가 둘러쳐지는 법이 없었기 때문에 선수들이 팬들과 함께 코스를 걸어가며 대화를 나눌 정도였다.

프로암이 끝나는 날 저녁이면 선수들은 마이크를 잡고 엔터테이너 역할도 했다고 한다. 베티 다드는 기타를 잘쳤고 자하리아스는 하모니카 솜씨가 뛰어났으며 탭댄스도 잘췄다. 매릴린 스미스는 피아노를 셜리 스포크는 리드 보컬을 맡았다.

선수들이 돌아가며 임원 노릇도 맡았다. 새로생긴 여자들 투어를 취재할 보도진이 있을리 없어 선수들은 경기가 끝나면 웨스턴유니언으로 달려가 경기결과를 AP,UPI등 통신사와 유일한 골프주간지였던 골프워드등에 송고했다.

자하리아스는 US여자오픈을 3차례나 우승했는데 마지막 1954년도 우승은 암수술후에 차지한 것으로 의미가 깊다. 당시 US여자오픈 마지막날은 36홀을 플레이하게 돼 있었는데 수술후 체력감퇴로 기진맥진한 자하리아스는 마지막 몇홀은 공을 굴리다시피 해가며 간신히 끝마쳤다. 그러나 AP통신이 선정한 ‘20세기 상반기 최고의 여자선수’ 명예를 얻었던 그녀는 결국 암이 재발, 42세의 아까운 나이로 세상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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