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나는 「3·8 따라지」"

2000-08-05 (토)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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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기행(1)

지난 6월 나는 북한을 세 번째 방문했다. 재미동포라고 누구나 평양을 가는 것도 아니고 또 누구나 갈 수 있는 곳도 못된다. 그렇기 때문에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김교수는 왜 평양을 자주 드나드는가?"라며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그들이 나를 보는 시각에 색깔론이 깔려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래서, 북한 기행문을 쓰기 전에 먼저 나의 성장 배경을 독자들에게 알려 그들의 의아심을 씻어주고 내가 그곳에서 보고 느낀 점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나는 1937년 11월4일 신의주의 수문동에서 태어났다. 일제 통치하에서 자라면서 일본말을 배웠고 잠깐 동안이지만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뀌었다. 창씨랄 것도 없이 내 이름인 金炯燦에“지마,”곧 “도(島)”라는 한문자를 추가하는 것으로 부모님이 마지못해 만든 듯 하다. 해방 전까지 일본학교를 다녔으나 지금 기억하는 것이라고는“오구니 히라메구오 노 히노마루” 따위의 노래 몇 곡뿐이다. 일본 군군주의자들이 조선 어린이들에게 일제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시키려고 만든 노래다.


해방을 맞아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하고 사회질서가 잡혀가면서 학교도 다시 가게 됐다. 나는 그때야 비로소 우리말과 글을 배웠고“진보적”인사들이 쓴 우리 역사책도 읽을 수 있었다. 그 역사책엔“만족의 반란”사건도 기술돼 있었다. 고려시대에 근로계급인 노예들이 양반에 대항하여 싸운 이야기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나는 1945년 가을부터 1948년 봄까지 소위“인민학교”라는 초등학교에 다녔다. 당시 코흘리개 어린이들이 시도 때도 없이 동원돼 거리에서“이승만 타도”등을 외치며 행진했던 모습이 아스라이 생각난다. 그때 배운 몇 가지 노래 가사들이 지금도 생각난다.“소년단 노래,”“김일성 장군의 노래,”“적기가”등이 제일 많이 불린 노래였다. 이번 북한 방문에서 평양 시민들이 아직도 적기가를 부른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유는 김정일 위원장이 그 노래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적기가의 가사는 "민중의 기, 붉은 깃발은 전사의 시체를 쌓노라. 시체가 식어 굳기 전에 우리들은 이 노래를 부른다. 높이 들어라 붉은 깃발을, 그 밑에서 전사하리라. 비겁한 놈아 갈 테면 가라. 우리들은 붉은 기를 지킨다..."로 돼 있다. 이 노래는 황장엽씨가 남한으로 망명한 후 김정일이 로동신문에 게재토록 해 민중으로 하여금 다시 부르도록 장려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남한)엔 월남한 이북 사람이 많이 살고 있는데 이들에도 두 부류가 있다. 첫째는“3·8 따라지”로 불리는 부류다. 이들은 해방 직후인 1945년 가을부터 1950년 6·25 동란 직전까지 삼팔선을 넘어 이남에 온 사람들이다. 둘째는 6·25가 터진 후 1·4후퇴 때 국군을 따라 남한으로 온 실향민들이다.

우리 가족은 3·8 따라지에 속한다. 부모님과 5남매인 우리 가족 중 큰 누님이 만주에서 이남으로 직접 가셨고, 큰 형님과 형수님이 1946년에, 작은 형님이 1947년에, 그리고 부모님과 내가 1948년에 각각 삼팔선을 넘었다. 작은 누님과 할머니는 신의주에 남으셨는데 그 작은 누님의 아들과 딸들이 지금도 신의주에 살아서 내가 북한에 갈 때마다 만나게 된다.

우리 가족이 왜 삼팔선을 넘었는지 나는 아직도 확실히 모르지만 나름대로 세가지 이유를 추정할 수 있다. 첫째는 온 가족을 기독교에 귀의시킬 정도로 독실한 크리스찬이셨던 어머님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남한을 택했을 수 있다. 둘째, 큰 형님이 사회청년단인가 하는 곳에서 일하다 체질에 맞지 않아 월남하자 당시 중학생이던 작은 형님이 그 뒤를 따른 것이 계기가 됐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 집이 좀 부유층에 속했기 때문에 머지않아 제거 또는 숙청 대상이 될 것으로 우려했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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