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국식 시어머니와 미국식 며느리.

2000-08-05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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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자의 세상읽기.

▶ 권정희 편집위원.

가족처럼 가까이 지내던 백인 할머니가 있었다. 어느 날 그 할머니가 저녁식사에 초대해 가보니 타주에 사는 아들부부가 와있었다. 그때 본 미국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모습은 참 인상적이었다. 시어머니는 집주인답게 아들부부를 위해 정성껏 음식을 준비하고 며느리는 오랜만에 만난 시어머니가 반가워서 옆에서 정답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관습의 속박이 없으면 고부관계도 저렇게 편할 수 있구나” 하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한국의 전통적 고부관계는 인내와 순종의 아름다움이 없지 않지만 결과적으로 여성들의 생애에 너무 가혹한 억압의 틀로 작용했다. 시대가 많이 바뀐 지금도 한국에서 젊은 부부가 이혼을 한다면 원인의 십중팔구는 고부간 갈등이라고 한다. ‘시’자만 붙으면 다 피하고 싶어서 ‘시금치’도 먹기 싫다는 것이 한국 젊은 여성들의 우스개소리다.

미국에 사는 한인들은 종종 미국식도 아니고 한국식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 있을 때가 있는 데 고부관계도 그 중의 하나다. 한국 여성이면서 ‘시’자 붙은 말에 별로 느낌이 없는 신종 며느리들이 집집마다 등장하고 있다. 관습의 굴레가 없는 미국식의 편안한 고부관계를 지향점으로 삼는다면 절반의 성공이라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정서적으로 여전히 한국식 고부관계에 익숙한 시어머니들이 미처 그런 며느리에 대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손뼉을 치면 양손이 딱 마주치지 않고 빗나가는 느낌’을 시어머니들은 자주 받는다고 한다.


“며느리 시집살이시키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어요. 미국서 자란 아이들이 그런다고 말을 듣겠어요? 그래도 며느리 맞을 때는 나도 모르게 기대가 있더군요”
‘며느리 맞는 맛’- 공손하고 다소곳하고 시부모 마음 헤아리려 애쓰는, 딸과는 또 다른 재미를 기대했는데 “닥쳐보니 그게 아니더라”고 한 시어머니는 말했다. 상대편인 며느리에게 ‘시댁’이나 ‘시어머니’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는 데 어쩌겠는가. 그래서 시어머니들이 모이면 굳이 며느리 흉을 보려는 것은 아니지만 ‘기도 막히고 섭섭하기도 한’ 마음들이 터져 나온다. 이런 얘기들이다.

“아들 결혼시키면서 집근처에 콘도를 사줬어요. 자주 왔다갔다하고 아기 생기면 아기도 봐줄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얼마 지나니까 아들집 가는데 눈치가 보이더군요. 프라이버시를 어떻게나 따지는지 코앞의 아들집 가는데도 미리 전화를 해야 돼요”

“토요일 아침에 파머스마켓에서 과일을 사서는 아들내외 잠깨우지 않으려고 집앞에 놓고 왔지요. 한참 기다려서 9시반쯤 전화해 현관 앞에 과일 있으니 들여놓으라고 했지요. 며칠 뒤에 아들이 말하더군요. 쉬는 날 아침에 전화하지 말라고요. 며느리 불편하게 하지 말라는 말 아니겠어요?”

“며느리가 외출한다기에 손자를 봐주러 갔어요. 3시에 온다던 아이가 안 와서 저녁준비까지 다하고 나니 6시에 와서는 ‘우리 저녁 먹었어요’ 하는 겁니다. 늦게 와서 미안하다거나 어려워하는 기색은 도무지 없어요”
“저녁초대를 하길래 갔더니 파스타에 샐러드 해놓고 종이접시에 내놓는 거예요. 시부모 식성이나 예의를 생각한다면 그럴 수 있겠어요?”

한인들이 미국에서 자녀를 키우면서 쉽게 빠지는 모순이 있다. 자녀들이 미국 주류사회에 진출할 수 있도록 어려서부터 타인종 속에 키우면서 사위 며느리는 한인을 고집하는 것, 그리고 딸들이 자기 커리어를 갖고 당당하게 사회활동을 할 수 있도록 키우면서 며느리는 다소곳하고 가정적이기를 바라는 것이다. 내 딸이 며느리가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생각해보면 며느리의 모습도 분명해진다. 자기 의견이 분명하고 당당하며 맡은 일을 확실하게 해내는 반면 너무 자기 중심적이고 실용주의적인 것이 미국서 자란 세대의 공통점이다.

“평생 시어머니 섬기고 나니 이제는 며느리살이하는 시대가 왔다. 우리는 손해보는 세대다”고 젊은 시어머니들은 말한다. 그것이 현실이다. 반면 격식이 고부관계의 틀을 잡아주지 않기 때문에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오히려 허심탄회하게 친해질 수 있는 장점도 있다. 며느리도 우리 세대가 만들어낸 우리들의 딸이다. 딸처럼 감싸주면서 가르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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