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SID 신드롬」

2000-07-24 (월) 1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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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살면서 귀찮은 일 가운데 하나가 이삿짐 싸고 푸는 일일 것이다. 젊었을 적에는 새 집으로 이사가는 기쁨이 짐 꾸리고 푸는 괴로움을 압도했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안됐지만 나이를 더하면서 이사 문제는 귀찮은 정도를 넘어 거의 악몽에 가깝게 느껴진다. 설사 대궐로 옮기라고 해도 옛집에 눌러 앉는데서 오는 편안함 때문에 여간해서는 움직이지 않게 된다.

만사가 대개 그렇듯이 인생교훈도 뜻하지 않게 얻게 된다. 지긋지긋하게 싫은 짐 꾸리는 일을 하면서도 인생교훈을 배운다. 엄청나게 많은 잡동사니 분량에 우선 놀라게 되고 소유하고 있었던 줄도 몰랐던 물건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발견된다. 평생 사는 동안 전혀 쓰임새가 없을 것들이 얼마나 많은 삶의 공간을 제약해 왔는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현대 소비문화의 노예가 되어 없어도 될 것들에게 눌려 산 증거가 쏟아지면서 심한 자괴감에 사로잡힌다.

따지고 보면 모든 재화가 개인 소유로 등기되었을 때만 엔조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공공재(public goods)가 좋은 예이다. 크고 작은 만족이 소유와는 전혀 무관하게 얻어진다. 경제학에서는 공공재를 "일단 존재하면 다른 사람들이 쓰는 것을 막을 길도 없고 또 다른 사람들이 쓴다고 닳아 없어지지도 않는 재화나 서비스"로 정의한다. 예를 들면 장엄한 레이니어산(Mt. Rainier)은 나 혼자 쳐다보거나 천명이 같이 보면서 감탄하거나 그 산의 가치가 줄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좋아한 만큼 내 만족도가 줄어들지 않는다.


이와는 반대로 사유재(private goods)는 두 가지 특성이 있다. 첫째는 소유자만 사용할 권리가 있다는 점이고, 둘째는 사용하면 소모된다는 점이다. 음식점에서 내가 주문한 불고기 한 접시는 나 또는 내가 지칭한 사람만 먹을 수 있고, 먹고 난 후에는 없어지기 때문에 그 고기는 다른 사람 차례가 안 된다.

여생을 큰 어려움 없이 살기 위해 얼마만큼의 재산이 필요한지 나는 잘 모른다. 다만 사유재의 요불요만 가릴 줄 알고 공공재의 만족을 극대화하는 길만 알아내면 의외로 적게 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공직 생활을 오래한 사람들이 흔히 겪는 현상 가운데 하나가 SID(Status-Income Disequilibrium) 신드롬이다. 특히, 높은 신분에 소득이 비례하지 못하는 상위직 공직자들에게서 많이 볼 수 있다. SID 신드롬은 낮에는 직위에 상응한 대접을 받다가 밤에는 평범한 시민 위치로 돌아가야 하는 이중생활이 그 요인이다. 근무시간 중 점심식사는 손님 접대비로 고급 식당을 출입하며 직장 내에서는 스탭과 개인 비서가 손발처럼 움직이며 비위를 맞춰주지만 밤에는 현실로 돌아온다. 집안 청소도 스스로 해야하고 정원의 잡초도 시간 나는 대로 뽑아야한다. 낮에 활동하는 공간에 비해서 집안은 답답할 정도로 좁다.

최근 한 조사에 따르면 사법부 최고위직인 대법관들의 재산 규모는 놀라울 정도로 빈약하다. 재산이 20만달러 미만인 대법관이 3명이고 그 중 한 명은 10만달러도 안됐다. 대법원장 자신도 50만달러(원화 5억원 정도)선의 재산을 갖고 있을 뿐이다. 이쯤되면 SID 신드롬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공직자들의 재산 상황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낮은 수준이다. 공직을 돈 모으는 수단으로 착각하는 사람이 많은 한국과 청백리들이 많은 미국의 중요한 차이는 바로 이점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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