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허준은 영웅이다

2000-07-06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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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 에세이

▶ 권기준 사회부장

허준은 끝났다.
지난 반년이상동안 우리의 가슴과 생활의 가장 중요한 한 부분으로 자리잡았던 허준이다. 모두가 허전해하고 있다.
한국 드라마를 비디오로 빌려 보기는 모래시계 이후 처음이다. 이같은 열정으로 허준을 보고 있는데 큰 아이가 오래간만에 한국비디오에 빠진 아버지가 이상하기라도 한 듯 "그렇게 재미있느냐"고 물었다. 그렇다고 했더니 "허준이 누구냐"고 다시 물어왔다. 그래서 "허준은 영웅"이라고 대답했다.

그렇다 허준은 영웅이다.
영웅이 무엇인가.
영웅은 그 시대를 상징하는 우상이요 구원자다.
우상은 ‘우리’로 느껴지는 일반 대중의 감성을 갖고 있으면서도 대중이 감히 실천하지 못하는 의지를 소유하고 어떤 환경도 이겨내면서 결국 성공을 창조하는 인물이다. 대중이 마음으로 갖고있는 목표를 실현함으로써 성공에 목마른 대중의 욕망을 해갈해준다. 한 시대의 우상은 이같이 성공을 하면서도 대중이 감히 갖지 못하는 무한한 사랑과 정의도 소유한다.
그래서 모두가 그를 흠모하고 따른다.

허준은 환경적으로 서자라는 태생적 한계와 경쟁자의 간교한 탄압을 극복했다. 불쌍한 사람을 치료하기 위해 수차례 과거도 놓쳤고 권력보다는 의서편찬을 위해 불타는 집념을 보였다. 언제나 소외계층의 편에서 숱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끝없는 의인(義人)의 사랑을 실천했다. 우리와 똑같은 환경에서 용서와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줬고 성공했다. 우리가 살지 못하는 삶을 대신 살았다. 그래서 대중의 마음속에 각인됐고 우상이 됐다.
영웅의 모습은 시대에 따라 바뀐다.


한 시대의 우상이 다른 시대에는 우상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허준은 사랑과 정의가 실종된 오늘과 같은 각박한 세상에 나왔기 때문에 더 진하게 우상적 영웅으로 우리곁에 다가왔다. 지금은 자기 욕심을 채우기 위해 죽어가는 불쌍한 생명을 담보로 의사들이 파업을 하는 세상이다. 학생과 학부모가 스승을 때리고 경찰이 범인을 빼돌리는 그런 세상이다. 허준은 존경하고 의지할 이상적 인물을 갈구하는 많은 대중들의 허기를 채워줬다.

지난 98년 박세리 선수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여자 US오픈을 제패했을 때 김대중 대통령은 ‘박세리 선수는 우리의 영웅’이라고 찬사를 보냈다.
박세리가 영웅이 된 것은 백인의 전유물로만 여겨졌던 LPGA를 평정함으로써 한창 IMF의 국란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던 국민의 어지러운 가슴을 위로하고 사방으로 흩어진 국민의 마음을 통합시키는 구원자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박세리는 어린시절의 혹독한 훈련으로 대중의 경험과 감성을 공유하고 한인 골퍼로는 처음으로 세계무대에 진출, 개척자의 어려움을 체험했다. 그래서 박세리가 해외 한인들에게 더 의미있는 우상으로 여겨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만약 박세리의 우승이 IMF 시대가 아닌 다른 시대에 나온 것이었다면 비록 세계적 선수로서 대단한 박수갈채를 받았을지 모르지만 ‘국민적 영웅’이라는 소리는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 시대를 상징하는 우상적 영웅으로는 엘비스 프레슬리와 다이애나도 있고 나폴레옹도 있다. 엘비스는 당시 흑인음악에 진저리치던 백인들에게 자존심을 심어준 우상이었다. 다이애너는 걱정없는 평화의 시대에 미모와 영국왕실의 안주인으로 뭇여성에게 대리만족을 채워준 우상으로 기억속에 남아있다.

허준은 끝났다.
인간은 어느 시대나 그 시대를 구원하고 편안하게 해줄 이상적 인간형을 갈망한다. 우상적 영웅을 기다린다. 영국의 역사가 토머스 칼라일은 ‘역사는 영웅들의 전기(傳記)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 시대에 이 사회에 많은 영웅들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그런 사회를 만드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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