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아가씨와 처녀.

2000-07-06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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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인이 본 한국*한국인

▶ 크리스 포먼.

이름이란 쉽게 발음할 수 있고 쉽게 기억되는 이름일수록 좋다. 대부분 사람들은 생소한 외국말 이름을 기억하려고도 하지 않기 때문에 이름 대신 ‘코리언’ ‘미국사람’ ‘동양사람’으로 대치시키고, 당사자 앞에서는 마땅한 호칭을 찾느라 우물쭈물 하기도 한다.

미국 생활, 특히 주류사회에 적응하기 위하여 직장이나 학교에서 미국 이름을 쓰는 한인들을 보게된다. 예를 들어 김승해 라는 이름대신 프레드 킴(Fred Kim)이라고 부르던가, 김현희를 ‘낸시’라는 미국이름으로 부른다. 쉽게 기억할 수 있고 쉽게 발음할 수 있는 편리가 있다. 미국사람이 한국에서 살게 될 때, 한국이름을 지어서 쓰게 되는 경우가 있다. 편리하다는 점도 있고 한국에 대한 애정과 경의를 표하는 마음에서이다. 미국이름을 가지고 있는 한국사람도 외국인이 한국이름을 가졌다는 것을 알고 의아해 하거나 신기해하는 것 같다.

평화 봉사단원 시절 제일 처음 하는 중요한 일이 한국이름을 짓는 일이었다. 한국말 강사가 우리들에게 이름을 지어 주고 이름의 의미를 설명하여 준다. 미국이름을 따서 쓰는 한국사람은 이름 하나면 되는데, 우리들은 한국말로 이름을 익힌 후 한문으로 이름 쓰는 것을 배워야 했다.


이름을 짓는데 아무 성씨나 이름을 따오는 것이 아니라 미국 이름을 기본으로 해서 한국이름을 지어 주었다. 예를 들어 내 이름 ‘크리스 포오먼’이 ‘오성민’으로 번역이 되었다. 나의 성 ‘포오먼’에서 ‘오’자와 ‘민’자를 따오고 ‘크리스’를 ‘성’으로 번역하였다. 내 친구 짐 맥과이어는 맹진수로, 캐른 배츨러는 백기란 이라는 한국이름으로 불리었다.

본인의 미국이름을 이용하여 지어준 한국이름이 대개 무난히 사용되었지만, 간혹 한국이름 때문에 농담의 대상이 되는 경우가 있었다. 한문의 뜻을 모르는 우리는 이름의 의미보다는 발음에 더 많은 관심을 두었다. 친구 한사람은 ‘고택준’이란 이름으로 불리었는데, 짓궂은 단원들이 그를 ‘코텍스’선생이라고 놀려 주었다. 한국사람 귀에는 고택준이라는 이름이 놀림감이 되질 않았지만 미국 청년들 귀에는 Kotex로 들렸기 때문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그를 놀렸던 기억이 난다.

발음 때문에 일어난 우스운 일들이 있는가 하면, 한국말을 영어로 번역할 때 정확한 어휘가 없기에 일어나는 우스운 일도 있다. 한번은 여자 봉사단원 캐른(백기란)과 남자봉사단원 몇 명이 다방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옆 테이블에 앉아있던 한인 남자 대학생 두서너명이 우리들에게 말을 걸어왔다. 영어 회화를 연습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 중에 한남자가 사전을 뒤지면서 캐른에게 이렇게 물었다. ‘Are you a virgin?’(당신은 처녀입니까?) 점잖게 생긴 우리또래의 남자가 아주 진지하게 물어본 말이라 웃음을 참으려고 애를 썼으나 내용이 너무도 황당하였기 때문에 우리들은 배를 잡고 킥 킥 거리며 웃음을 참았다. 영어 문법 상으로 틀린 것이 없는 문장이었지만 ‘Virgin’이란 단어에 함축된 의미 때문에 홍당무가 되 캐른을 보면서 참지 못하고 우리들은 배꼽을 잡고 웃었다.

한영 사전에 ‘아가씨(미혼)’라는 말이 ‘처녀(Virgin)’로 번역이 되었던 것 같다. 아마 그 시대에 한국에서는 처녀와 아가씨라는 개념이 구별이 없었는지 모르지만, 60년대 성 해방과 자유로운 섹스를 부르짖었던 미국여성들에게는 처녀라는 말이 너무도 타당치 않았기 때문에 우리들은 배를 잡고 웃었던 것이다. 그후, 짓궂은 남자 봉사단원들은 여자봉사단원들에게 모르는 척 시침을 떼고 “By the way, are you a virgin?”하며 골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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