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떨치고 떠난다

2000-06-29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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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뉴스에세이

▶ 이 정인(국제부 부장대우)

올해들어 벌써 두 번째 한국행을 했다. 2주 휴가를 반으로 쪼개 벌써 1월에 썼기 때문에 나머지는 가을까지는 아껴두리라 했는데 쓰고 말았다. 휴가지도 이번에는 한국이 아닌 동구유럽쪽을 택하리라 했는데 또 한국이었다.
다름아닌 여행파트너, 휴가동반자인 여동생 2명의 간청때문이었다. 약사인 이들이 7월이면 의약분업이 실시되어 골치가 아플 에정이므로 6월중에 충전 여행을 꼭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비행기만 타고 와. 국내 경비는 다 댈께"라는 애교도 덧붙였다.

벌써 만 5년째 계속되는 정기여행이라 특별한 준비가 필요없었다. 가볼 곳과 만나볼 사람들을 정하고 차와 자세한 안내지도, 그리고 왕성한 호기심과 열정이 있으면 됐다. 여정은 변해도 관계없고 쉬고 싶으면 꼼짝않고 한곳에서 있어도 되는 거였다. 한정된 시간이나마 자유로와지자는 것이 여행목표였다.

휴가기간을 아끼기 위해 밤비행기를 타고 김포공항에 내리자 마자 전국일주 여행은 시작됐다. 먼저 강원도행. 언제 만나도 생후 20여년 이상의 공통된 추억과 화제가 있어 웃음보따리가 마르지 않는 것을 또한번 느끼며 신갈에서 영동고속도로로 접어들었다.


가본 적 없는 길을 운전해서 찾는 것은 지도보기가 생활화된 미국에서 산 나의 일이다.
시원하게 강릉으로 빠졌다. 경포대에서 동해물로 발을 씻으며, 주문진에서 팔딱팔딱 뛰는 생선을 걸죽한 아줌마들과 거래하니 소록소록 사는 맛이 살아 났다. 천연온천과 탄산온천을 한꺼번에 맛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라는 내설악의 오색약수터에 몸을 담그니 온몸의 나쁜 기운이 다 빠져나가는 듯 했다.

눈에 밟히는 현실을 제치고라도 정말 떠나오기 잘했다고 느꼈다. 여동생들도 내내 중얼댔다. "그래 이런 낙을 가끔 찾지 못한다면 일상사가 얼마나 시들할까", "내가 행복하지 않고 불만에 가득차 있다면 과연 가족이나 고객을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을까"라며.
동해시를 거쳐 울진의 불영계곡과 경주에서도 관광객은 거의 찾지않는 진평왕능과 설총묘를 돌아보고 부산 광안리의 시끌벅쩍함을 편안한 마음으로 대했다.

임꺽정 닮은 어느 목판화가의 팽나무밑 오두막 아틀리에서 하루를 유숙하고 남해고속도로를 타고 전라도로 내달았다. 송광사에 이어 유성온천까지 와서 그사이 피로를 씻어냈다. 다시 속리산으로, 그리고 최근 전원주택을 마련한 한시인을 찾아 천안으로 해서 서울로 다시 돌아오는데 걸린 시간은 3박4일이었다. 2년전에 비해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이 눈이 번쩍 띄도록 깨끗해진 것도 행복했다.

물론 피곤했다. 좋다고 사먹은 찰옥수수와 번데기등으로 배탈이 나기도 했다. 잠이 모자라 운전도중 ‘혼이 들락날락하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여자끼리라 조심하고 긴장해야 할 순간도 있었다. 왜 사서 고생인가고 푸석푸석한 얼굴로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집에 들어오는 순간 "홈 스윗 홈! 집보다 좋은 곳은 없어!"라고 부르짖는 것은 언제나 똑같았다. 며칠이라도 방치한 가족의 얼굴이 더욱 정겨워 한 몇 달은 잘해준다는 소감도 항상 같다.
8남매중 유난히 기가 맞는(아니 여행시작전에는 정말 맞는지도 몰랐다) 우리 3자매지만 ‘일상을 떨치고 떠나는 여행’의 시작은 남들과 같이 어려웠다.

먼저 미국과 한국에 떨어져 있어 그랬고 특히 내 경우 시간과 경비를 만들어내는데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그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남편과 자식의 눈치를 보는 거였다. 이기적인 아내나 엄마로 미워하면 어쩌나. 그뿐인가. 3명의 남동생과 요조숙녀 올케들도 ‘여자끼리의 무모한 떠남’을 은근히 비난했다.

떠나고 싶은 마음과 발을 붙잡는 사건(?)들이 자꾸 만들어졌다. 또 한국의 정서로 아직 그같은 여행을 보는 시각은 부정적이어서 여행도중 투숙하거나 식당에서 괜히 쑥스러워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첫여행의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결혼하고 아이낳고 키우며 자신의 가족, 가정에만 몰두해서 좀 멀어졌던 피붙이의 끈끈함을 되찾았다. 다른 삶이나 저변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과 마음의 폭이 커졌다. 철따른 자연의 아름다움에 감탄과 박수를 치는 순수함이 되살아 났다. 고민이나 어려움이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나 겪는 사소한 일상사임을 알고 크게 위로를 받았다. 40년 넘게 일궈 온 경험과 지혜도 나눴다.

3박4일을 자신에게 투자해서 얻은 행복감은 근 1년정도 위력을 발휘해왔다. 그래서 지난 5년간 한해도 걸르지 않고 3박4일간의 국내나 해외여행을 함께 감행했을 것이다. 이번의 전국일주 여행도 삶이 가뭄으로 시들해질때마다 샘물이나 소나기가 되어 갈피갈피를 적셔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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