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한국 미나리가 이민온 사연

2005-09-20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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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 밭에 물과 거름흙을 부을 때마다 나는 “도대체, 누가 이 한국 종 미나리를 어떻게 미국 땅에 가져 왔을까?”하고 미나리가 이민을 오게 된 사연에 대하여 퍽이나 궁금했었다.


수 년 동안 걸려 내가 홀로 만들어 가고 있는 우리 집 정원 한쪽에는 작은 미나리 밭이 있다. 요즈음은 미나리를 재배하는 사람들이 많아져 슈퍼마켓에 자주 나오지만 이십 여 년 전 미국으로 이민 와서 한국 미나리를 처음 만나던 일은 정말 신기했다.
오래 전, 우리가족은 샌디에이고의 한인회 연중 행사인 교민들의 모임에서 웃는 얼굴의 자그마한 한 아저씨를 처음 만났다. 그는 뜨거운 태양 아래서 땀을 뻘뻘 흘리며 교민들이 먹을 갈비를 부지런히 굽고 있었다. 그런 인연으로 알게 된 우리는 그분의 가족들과 지금껏 친분을 나누며 잘 지내 오고 있다. 어느 날 그의 부인이 자기 집에서 길렀다는 싱싱한 미나리 한 봉투를 나에게 먹어보라며 뿌리도 함께 주었다. 우리 집 뜰의 한쪽에 뿌리들을 심었다. 농사에 문외한이던 나는 자리를 이리저리 옮겨가면서 실패를 거듭한 끝에 겨우 미나리 키우기에 성공했다. 나의 인생살이도 모두가 나의 노력에 따라 성패가 달려있듯이 미나리를 기르겠다는 나의 탐구심이 드디어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흥건한 물 속에서만 자란 줄로 알았던 미나리가 듣던 말처럼 밭에서도 신기하게 아주 잘 자랐다. 사람들은 밭에서 자란 미나리를 약초가 되는 돌미나리라고 부른다. 미나리는 많은 수분을 먹으며 응달진 진 곳에서 길러야 연하게 자랐다.
그런데 미나리 밭에 물과 거름흙을 부을 때마다 나는 “도대체, 누가 이 한국 종 미나리를 어떻게 미국 땅에 가져 왔을까?”하고 미나리가 이민을 오게 된 사연에 대하여 퍽이나 궁금했었다.
그런데 2002년 봄, 샌디에이고의 한인회관 건립기금 모금을 후원하는 북한그림 전시회장에서였다. 한인회관에서 자원봉사로 일을 돕다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는 우연히 듣게 됐다. 하루는 전시회를 개최하던 김 사장 부부를 우리 집에 모셔와 식사대접을 했다. 그분들은 우리 집 뜰에서 자라고 있는 미나리를 보고 매우 즐거워했다. 그래서인지 우리랑 함께 전시회를 준비하던 중에 우리 집 미나리 밭에 대한 칭찬을 그 부부가 갑자기 꺼내는 것이었다. 그때 바로 그런 이야기를 듣자마자, 한인회 부회장으로 봉사하던 L여사가 곁에 있다가 당신이 미나리를 처음으로 미국에 가져온 당사자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너무나도 반갑고 궁금하던 나는 어서 한국 미나리가 이민 온 그 사연을 들어보자며 L여사에게 재촉을 했다.
그녀는 미국인 남편과 결혼하여 1969년부터 샌디에이고에 살고 있는 교포이다. 1974년에 11개월 된 아들을 데리고 고국방문을 했는데 친정집에서 오랜만에 먹은 동치미 속에 들어 있던 미나리가 너무나도 시원하고 향긋해 반해버렸다고 했다.
어떻게 하면 미국으로 미나리를 가져와 자기 집 마당에 심어 볼까하고 밤새껏 궁리를 그녀는 했다고 말했다. L 여사는 단단히 각오를 하고 귀국하기 전날 오후에 집 근처의 남대문 시장으로 가서 미나리 한 단을 샀단다.
뿌리부분만을 싹둑 잘라내고 궁리를 했다. “그렇지! 아들의 기저귀 속에 넣어보자. 그리고 물어보면 똥이라고 말하자. 설마 우리 아들 똥을 보자고는 안하겠지?” 참으로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던 것이다. 미국인 남편과 살고 있는 그녀는 플라스틱 커버가 되어있는 최신형 기저귀를 그 당시 사용했다.
L여사는 출발 전날 밤에 장시간의 비행으로 미나리가 시들까 봐 물도 살살 뿌렸다. 그리고는 기저귀 속에 뿌리를 넣고 둘둘 말았다. 그녀는 미국으로 미나리를 가져간다는 흥분과 들킬까하는 불안감으로 그날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단다.
다음 날, 그렇게 불안감으로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은근히 안은 채 L여사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마침내 도착하여 로스앤젤러스의 공항 검사대에 들어가며 얼마나 조마조마 했는지 그 당시를 생각하면 지금도 떨린다며 그의 가슴을 쓸어내리며 그녀는 회상했다. 하지만 미나리를 가져다 준 조상을 찾아내 반가워하는 내 얼굴을 보고는 그녀는 기쁨으로 상기 되며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이 속에 무엇이 들어있지요?”하고 묻는 공항 직원의 말에 “My baby poopoo…….(우리아기 또~  ~(똥)이요.)”라며 더듬거리듯 대답을 하면서 재빨리 마음속으로는 큰 호흡을 했단다. 그리고는 시치미를 뚝 떼었다고 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공항아저씨는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오우~케이~”하고 장난스럽게 똥냄새가 난다는 듯이 미소를 지으며 무사통과를 시켜주더라는 것이었다.
미국 검사원이 만약 기저귀 속을 조사해 보자며 펼쳤더라면 미나리는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가야만 했다. 또 운이 나쁘면 엄청난 벌금까지 물어야하는 대모험이었다. L여사가 생생하게 들려주던 뜻밖의 이야기는 마치 기막힌 스릴을 느끼게 해주는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9·11테러 사건 이후로 모든 승객의 안전을 위해 신발까지 벗어야 하는 지금의 삼엄한 미국공항 검사대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인심 좋고 살기 좋은 그 시절에 나의 사랑 미나리는 그렇게 희한한 사연을 안고서 행운의 기회를 틈타 미국으로 이민을 왔던 것이다. L 여사는 우리부부가 한인회 사무실에 볼일이 있어 들릴 적마다 한결같이 수 년 동안 봉사를 하고 있었다. 고국의 향수인 우리입맛을 가지고 오려던 의지가 대단했던 그녀의 용감했던 사연을 듣고서 나는 고마움을 느꼈다. 그래서 이런 깊은 사연을 사람들이 알고서나 미나리를 먹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글로 써서 나는 동네방네 나팔을 불고 싶어졌다.
고향인 빛 고을 광주에 살 때, 큰 잔치 때면 빠지지 않던 새콤한 홍어회를 나는 유난히도 즐겨 먹었다. 아버지 말씀대로 칼슘이 많다는 물렁뼈를 오도독 오도독 씹어보는 홍어회 무침 속에 들어있던 싱싱한 무채와 향긋한 미나리의 맛은 일품이었다. 그 맛을 상상만 해도 나의 입안에는 군침이 돈다. 친정어머니가 고소하게 만들어주시던 초록빛 미나리전의 진한 향기도 난 잊을 수가 없다.
그런 추억들 때문에 미나리가 이렇게 우리 집 뜰 안에 가족이 된 것이 나는 더더욱 기쁘다. 우리 집에 오신 손님들에게 때때로 맛있는 미나리 전(지짐)을 후다닥 지져서 나는 대접을 하며 내 고향 맛을 은근히 소개도 한다. 그리고 우리 집 미나리 밭을 자랑하며 수다도 떤다. 좋아하는 분들에겐 한 움큼씩 뜯어 드린다. 손님들은 100% 무공해 야채와 나의 작은 정성을 받으니 모두들 함박웃음이 얼굴에 가득하다.


어느 날, 유기농채소를 기르는 미국 이웃에게 한국미나리라며 소개했더니 그분도 나에게 자기 밭에 있는 미국종 미나리 모종을 나누어주었다. 잎 모양이 둥근 서양종 미나리는 연하였지만 향기도 달랐고 우리 것과 달리 톡 쏘는 매운 맛이었다. 세상에는 가지가지의 민족들이 모여 살듯이 서양종 미나리와 우리 한국종 미나리의 맛 역시도 어쩜 제각각일까!
거침없이 쑥쑥 퍼져나가고 있는 미나리 밭을 들여다보노라니 끈기 있게 살아가는 우리 한민족의 기개도 마치 미나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계 방방 곳곳에 이민을 와서 나름대로의 눈물겨운 사연들을 안고 그들은 정말 악착같이 잘도 살아간다. 사랑하는 조국을 떠나 와 생판 모르는 나라에서 미나리처럼 당당하게 살아가는 우리 부지런한 한국인들.
미나리는 맛과 향도 일품이지만 바이타민 A와 C, 여러 무기질이 들어있는 알칼리성 식품이라고 한다. 생선 매운탕 속에서 비린내도 제거해 주며 국물의 향기와 개운함을 더해준다. 술을 마신 다음날 시원한 국물은 우리 몸의 주독을 해독해준다. 혈액순환을 돕고 우리의 간과 건강에 좋은 강장식품이라고 약초전문가들은 말한다. 우리들의 식탁에서 맛있는 행복을 소리 없이 뿌려주는 안개 같은 약미나리처럼 나도 한국토종 미나리가 되어 사랑받으며 당당하게 살아가야겠다.



최미자
약 력
미주현대불교 필진
현대문예 등단
재미수필문학가협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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