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가는 시계’
2026-06-02 (화) 12:00:00
나태주
천천히, 천천히 가는
시계를 하나 가지고 싶다
수탉이 길게, 길게 울어서
아, 아침 먹을 때가 되었구나 생각을 하고
뻐꾸기가 재게, 재게 울어서
어, 점심 먹을 때가 지나갔군 느끼게 되고
부엉이가 느리게, 느리게 울어서
으흠, 저녁밥 지을 때가 되었군 깨닫게 되는
새의 울음소리로만 돌아가는 시계
나팔꽃이 피어서
날이 밝은 것을 알고 또
연꽃이 피어서 해가 높이 뜬 것을 알고
분꽃이 피어서 구름 낀 날에도
해가 졌음을 짐작하게 하는
꽃의 향기로만 돌아가는 시계
나이도 먹을 만큼 먹어가고
시도 쓸 만큼 써 보았으니
인제는 나도 천천히 돌아가는
시계 하나쯤 내 몸속에
기르며 살고 싶다.
‘천천히 가는 시계’ - 나태주
루이스 멈포드는 시계의 발명을 현대산업사회의 시작으로 보았다. 수탉이 울면 눈을 뜨고, 뻐꾸기 울면 점심 차리고, 부엉이 울면 저녁밥 짓던 유기적 시간은 날카로운 시침과 분침과 초침에 의해 잘려나갔다. 시계가 노동과 일상을 통제하는 수단이 되자 자연의 리듬과 조화를 이루던 생체 시간은 빠르게 해체됐다. 우리는 이제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시곗바늘이 가리켜서 밥을 먹고, 졸려서가 아니라 출근 시간을 맞추기 위해서 잔다. 시계는 높은 곳에서 째깍째깍 다그치고, 사람은 낮은 곳에서 힐끔힐끔 눈치를 본다. 누가 주인인가? [시인 반칠환]
<나태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