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 부유층의 ‘비밀 금고’로 통했던 스위스가 역외 자산관리 시장 1위 자리를 홍콩에 내준 것으로 나타났다. 아시아 부의 폭발적인 성장과 중국 자금 유입이 맞물리면서 글로벌 자산 흐름의 중심축이 유럽에서 아시아로 이동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29일(현지시간)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에 따르면 글로벌 컨설팅업체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은 지난해 기준 홍콩의 역외 자산 규모가 약 2조 9000억 달러(한화 약 4370조 원)에 달했다고 추산했다. 이는 스위스를 처음으로 넘어선 수치다.
역외 자산은 개인이나 기업이 자국 밖 금융기관에 맡겨 운용하는 자산을 의미한다. 통상 세금 절감, 투자 다변화, 정치·법률 리스크 분산 등을 목적으로 이동한다.
특히 홍콩이 유치한 자산 가운데 약 60%는 중국 본토에서 들어온 자금으로 분석됐다. 중국 경기 둔화와 미·중 갈등 장기화 속에서 자산가들이 해외 분산 투자 수요를 크게 늘린 영향으로 풀이된다.
시장에서는 단순한 절세 목적보다 불확실성 회피 성격이 강해졌다는 해석도 나온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지정학 리스크와 각국 규제 변화가 커지면서 자산가들이 특정 국가에 자산을 집중하기보다 여러 금융 허브에 나눠 보관하는 흐름이 뚜렷해졌다는 것이다.
스위스 기반 자산관리업계 관계자인 마이클 펠먼 로우랜드는 FT 인터뷰에서 “과거와는 전혀 다른 양상”이라며 “최근 고객들은 수익률보다 관할권 분산 자체를 중요한 전략으로 여기고 있다”고 설명했다.
홍콩의 급부상 배경에는 살아난 중국 자본시장도 꼽힌다. 최근 홍콩 증시가 회복세를 보이면서 중국 기업들의 해외 자금 조달 창구 역할이 다시 강화됐고, 전기차·배터리·인공지능(AI) 등 첨단 제조업 분야에서 중국 기업 영향력이 확대된 점도 자금 유입을 자극했다는 평가다.
반면 오랫동안 ‘안전자산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스위스는 성장세가 둔화하는 분위기다. 글로벌 금융 규제가 강화되고 미국·유럽의 조세 투명성 압박이 커지면서 과거 같은 절대적 우위를 유지하기 어려워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아시아 금융허브 경쟁 구도도 한층 치열해지고 있다. 홍콩과 함께 대표 수혜지로 거론됐던 싱가포르는 최근 대규모 자금세탁 사건 이후 감독당국이 외국인 자산 심사를 강화하면서 성장 속도가 다소 주춤한 것으로 전해졌다.
BCG는 향후 아시아 지역의 부 축적 속도를 고려하면 홍콩과 스위스 간 격차가 더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오는 2029년에는 홍콩의 역외 자산 규모가 스위스를 약 6000억 달러(한화 약 902조 원) 이상 앞설 수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서울경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