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3월8일, 국제 여성의 날에 뉴욕타임스는 ‘뒤늦은 부음’(Overlooked No More)이란 코너를 신설했다. 이 신문은 1851년 창간 때부터 부고(Obituaries)를 써왔으나, 오랜 세월 그 주인공 대다수가 백인이고 남성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뒤늦게나마 역사에서 잊히거나 가려진 여성과 유색인종, 소수자들의 삶을 조명하고 기록하는 시리즈를 만든 것이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뒤늦은 부음’에 소개된 인물은 300명이 넘는데, 그 중에 한국인 3명이 포함되었다. 독립운동가 유관순(1902-1920), 일본군위안부 피해 최초공개자 김학순(1924-1997), 그리고 1.5세 미주한인 예술가 차학경(1951-1982)이다.
그리고 지난 6일, 뉴욕타임스는 다시 3월 여성 역사의 달을 맞아 이제껏 부고가 실린 수많은 여성 가운데 뚜렷한 족적을 남긴 112명을 선정했다. 그 업적을 10개 분야로 나누어 소개한 이 리스트에는 한국인 2명이 포함됐는데, 유관순과 또 다른 일본군위안부 피해자 길원옥(1928-2025)이다. 유관순 열사는 ‘때 이른 죽음을 맞이한 여성’ 8인의 한 명으로, 길원옥 여사는 ‘역사적 사건의 생존자’ 13인 중 하나로 선정됐다.
리스트에 오른 112명은 모두 특별한 삶을 살았던 여성들이다. 익히 알려진 인물도 있고 생소한 이름도 많지만, 모두 부고기사 링크가 연결돼있어서 각양각색의 스토리를 들여다볼 수 있다. 죽음을 알리는 부고가 사실 삶에 관한 이야기라는 점은 좀 기묘하다.
10개 분야의 첫 스토리는 ‘권력과 충돌하여 스캔들을 일으킨 여성들’이다. 여기에는 마우쩌둥의 아내 강청, 영국 ‘스캔들’의 주인공 크리스틴 킬러, 그리고 엡스틴과 앤드루 왕자의 성매매를 폭로한 버지니아 주프레 등이 포함됐다.
두 번째는 전쟁. 강제이주. 폭력. 질병 등의 소용돌이에서 살아남은 ‘역사적 사건의 생존자들’로, 길원옥 여사 외에 미육군 최초의 흑인간호사 낸시 레프리난트 콜론, 생후 9주 때 타이태닉호 재난에서 살아남은 밀비나 딘, 나치점령과 전쟁 중에 스파이와 예술가로 활동한 여러 여성들이 선정됐다.
세 번째는 ‘최초’ ‘유일한’ ‘마지막’ 여성들이다. 흑백결혼이 불법이던 시절, 백인남편과 결혼한 밀드레드 러빙은 법정투쟁을 벌여 1967년 역사적인 대법원의 인종간 결혼합법화 판결을 이끌어냈다. 클로데트 콜빈은 1955년 로자 팍스보다 9개월 먼저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아 체포됐으나, 미성년이었던 탓에 묻히고 말았다. 불굴의 헬렌 켈러, 샌드라 데이 오코너 첫 여성대법관, 로 대 웨이드 판결의 실제 원고인 노마 맥코비가 이 독보적 여성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다.
‘변방에서 문화를 빛낸 여성들’도 있다. 소울의 여왕 아레타 프랭클린, 파리에서 성공한 전설적인 예술가 조세핀 베이커, 시인 마야 안젤루, 중국계 최초의 할리웃 스타 애나 메이 웡 등이 그들. ‘예술과 삶이 분리되지 않는 여성들’로는 마리아 칼라스, 티나 터너, 에이미 와인하우스, 빌리 할러데이, 시인 오드리 로드와 도로시 파커 등이 꼽혔다.
유명한 남자의 그림자에 가린 조연이었으나 실제론 주인공이었던 인물들이 있다.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 코레타 스콧 킹, 엘리노어 루스벨트, 말콤 엑스의 어머니 루이즈 리틀, 영화 ‘빅아이’의 화가 마거릿 킨, 종군기자였던 헤밍웨이의 아내 마르타 겔혼, 자신의 발견을 남자동료들에게 뺏긴 과학자 리즈 마이트너와 마르트 고티에가 그들이다.
이 외에도 ‘헤드라인을 만든 여성들’에는 배우 말린 디트리히와 주디 갈랜드, 노벨상 수상작가 토니 모리슨, 프랑스요리를 대중화시킨 줄리아 차일드, 화장품업계의 거인 에스티 로더가 이름을 올렸고, ‘나라의 방향을 바꾼 지도자’로는 인디라 간디, 골다 메이어, 마더 테레사, 마거릿 대처, 베나지르 부토, 루스 베이더 긴스버그가 선정됐다.
‘때 이른 죽음을 맞이한 여성들’은 유관순 외에는 모두 연예인이다. 배우 마릴린 먼로와 나탈리 우드, 가수 셀레나, 알리야, 소피, 카렌 카펜터가 꼽혔다.
이 리스트는 175년간 뉴욕타임스 역사의 궤적 안에 들어온 사람들만을 다룬 것이다. 만일 5,000년 역사 속 한국여성들의 업적을 조명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오랫동안 여성의 역할은 거의 기록되지 않았지만 한국 최초의 여성군주였던 신라의 제27대 왕 선덕여왕, 그 뒤를 이은 제28대 진덕여왕, 그리고 고려왕실에서 섭정으로 강력한 권력을 행사한 천추태후는 이름을 남겼다.
조선 중기에는 예인들인 황진이, 신사임당, 허난설헌이 있고, 19세에 적장을 안고 강물에 뛰어든 논개가 있다. 조선 후기에는 제주 거상 김만덕과 실학자 이빙허각이 있고, 근대로 와서는 유관순 열사와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그리고 ‘한국최초’의 수식어를 가진 여성의병장 윤희순, 페미니스트 예술가 나혜석, 여기자 최은희, 여의사 박에스더를 꼽을 수 있겠다.
현대의 한국여성은? 너무 많아서 나열하기 힘들고, 앞으론 남성보다 많아질 지도 모른다. 그런 한편,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는 않았으나 조용히 세상을 바꾼 여성들이 얼마나 많았는지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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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숙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