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돌리자 라이스는 소련학의 대가로 박사학위를 받자마자 불과 26세에 명문 스탠퍼드 대학의 정치학과 부교수로 임명되어 세상을 놀라게 했다. 34세에 조지 H. W부시 행정부에 소련 자문역으로 정계에 입문해서 국가 안보 위원회, 소련-동유럽 국장을 지냈다.
또한 그녀는 조지 W.부시 정부 출범과 함께 국가 안보 보좌관을 4년간 역임했고 국무장관까지 지냈으며 흑인 최초로 명문 버밍햄 음악학교에서 피아노를 전공했고 일평생 교회에 반주자로 기쁨을 느끼며 살았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고백했다. “나의 나의 할아버지, 아버지, 삼촌들은 장로교 교회 사역자들이었다. 그래서 나의 가족들의 일요일은 교회를 의미했고 교회는 우리 가정의 삶의 중심이었다.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 버밍햄 블랙에는 인종차별이 아주 심했기 때문에 우리에게 교회는 단순히 예배만의 장소가 아니고 우리 흑인들의 공동체 사회적 공간이며 시민 활동의 공간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한번도 하나님의 존재를 의심해 본 적이 없다. 우리 가족이 교회로 다 몰려가면 항상 주님은 먼저 교회에 오셔서 기다려 주셨고 1981년 스탠포드 대학에 교수로 재직하기 위해 캘리포니아로 이사 온 후로 모든 게 너무 시간대가 맞지가 않아서 가끔씩은 교회를 가지 못하고 혼자서 집에서 예배를 드릴 때도 더러 있었다.
어느 주일 아침에는 사랑하는 친구들이 내 집을 방문하겠다고 연락이 와서 그들이 도착하면 무엇을 해서 무엇을 대접을 할까 근심 걱정하고 있던 차에 방문한 그들의 손에는 모든 음식 재료가 가득가득 들려 있었다.
그것은 친구들이 준비해 가지고 온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주님께서 준비하여 보내 주셨다고 생각하며 많이 감격하였다. 미국에서 자주 일어나는 테러와 테러가 몰고 온 비극은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해주었고 그 중에서도 우리의 흑인들이 얼마나 많이 길거리에 쓰레기처럼 널려서 죽어 있었는지 이 참담한 상황을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우리 흑인들 교회에서는 며칠씩 교회를 떠나지 않고 울며 통곡하며 기도드렸다.
이 거대한 미국에 살면서 언제까지 얼굴이 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환란을 당해야 하는지 우리는 오랫동안 마음의 상처들을 가지고 지내왔다. 이때 나는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서 몇 달을 각 흑인 교회로 주일날마다 방문하면서 그들에게 주님의 위로를 진심으로 쏟아냈지만 그들은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
나는 가는 곳마다 욥기서를 찾아서 큰 소리로 읽으면서 하나님은 욥이 가진 모든 부와 건강, 가족, 모든 것을 다 거두어 가심으로 욥의 믿음을 시험하셨는데 욥은 실망하지도 좌절하지도 않앗다. 욥의 고난이 우리 인간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지만 욥의 고난은 오히려 욥의 믿음을 강건하게 해 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안타까운 마음으로 사랑하는 이들이여, 어떠한 시련과 고난이 닥치더라도 대항하지 말고 푯대를 향하여 쫓아가기를 바란다고 가는 곳마다 눈물로 호소했다”
이 콘돌리자 라이스의 믿음을 보며 많은 회개와 기도를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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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란/선교사·두리하나USA뉴욕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