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주 만드는 과정 (사진 제공: 장선용)
“What did you say?” (뭐라고요?)
커피숍의 바리스타로부터 이 질문을 세 번 연속 받았을 때, 나는 바닐라 라떼(Vanilla latte)를 포기하고 블랙 커피(Black coffee)를 주문했다. 내 뒤에서 주문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미안하기도 했고, 많은 커피 주문량을 소화하느라 지쳐 보였던 그 바리스타 앞에서 민망했기 때문이다.

정성껏 메주를 말리시는 장선용 선생님

시간을 건너고 있는 메주들
한국에선 아메리카노는 물론이고 온갖 재료를 추가한 특수 음료까지 주문하던 나였는데, 미국에 와서 바닐라 라떼 한 잔을 주문하는 것도 버겁게 되다니. 뿐만 아니라 160센티미터인 내 키가 몇 피트인지 몰라 당황스럽고, 고기 한 근이 몇 파운드인지 몰라 덤터기를 쓰는 날들이 이어졌다. 십수 년이 지난 기억이지만, 나의 무능함에 마냥 서럽고 억울했던 그날들이 아직도 생생하다.
다만 이제는 상황이 좀 나아졌다. 나는 마운틴뷰의 명물, 레드락 카페(Red Rock Cafe)에서 “코르타도(Cortado, 에스프레소에 카푸치노보다 적은 양의 우유가 들어가는 커피)”를 자연스럽게 주문하고, 바리스타와 커피 로스팅 방식까지 이야기를 주고받게 되었다. 이 괄목할 만한 영어 말하기 성장의 비결은 다름 아닌 ‘되찾은 나의 큰 목소리’에 있다. 나다운 목소리로 상대가 들을 수 있도록 크게 말하는 것. 뒤돌아보니 이 비결을 터득하기까지 일일이 헤아릴 수 없는 지난 시간들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이민 생활을 하다 보면 즉시 평가받는 자리에서는 늘 부족함을 느끼게 된다. 질문도, 답변도 어딘가 한 박자씩 늦다. 그러다가 그 부족한 시간들을 되돌아 볼 때면 문득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쓸모없어 보였던 경험들과 버텼던 시간들이 서로 엮이며 하나의 방향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는 사실 말이다. 비록 누군가에게 그 방향을 재빨리 보여 줄 수는 없었지만, 그사이 삶은 충실히 스스로의 의미를 엮어 내고 있었다.
대두(大豆, soybeans)에 속하는 메주콩을 만났을 때 나는 이 감각을 떠올렸다. 메주콩은 조리해서 바로 먹기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고 맛의 보상도 즉각적이지 않다. 그래서 빠르게 평가받는 자리에서는 늘 불리하다. 하지만 이 콩은 처음부터 그 자리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 메주콩은 오래 머무는 환경을 전제로 선택된 콩이기 때문이다.
메주콩은 대두의 ‘다른 이름’이 아니라 대두 중에서도 ‘다르게 선택된 콩’이다. 대두는 식물학적 또는 농업적 이름이자 Glycine max라는 하나의 작물 전체를 뜻한다. 그러나 메주콩은 학술 용어가 아니며, 용도 중심의 생활 언어다. 즉, 모든 메주콩은 대두이지만 모든 대두가 메주콩은 아닌 것이다. 특히 메주콩으로 쓰이는 대두에는 명확한 기준이 있다. 우선 메주콩은 알이 크고 단단하다. 또 껍질이 비교적 두껍고 단백질 함량이 높다. 그렇기에 불리고, 삶고, 형태를 만들어 오랜 시간 두어도 썩지 않는다.
메주를 만들기 위한 메주콩은 10월에 수확한 햇콩으로 준비한다. 이 햇콩은 미국 마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렌틸콩, 병아리콩, 완두콩 등과 달리 유난히 찾기 어렵다. 아시안 마트에 가면 건조 대두(dried soybeans) 혹은 냉동 에다마메(edamame)를 비교적 쉽게 찾을 수는 있으나, 햇콩을 구하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수요가 적기 때문이다.
사실 미국에서는 메주콩으로 쓸 대두가 없거나 모자란 것이 아니라 ‘콩’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대두는 대부분 오일(콩기름)이 되거나 단백질로 분리되어 가공된 상태(두부, 템페 등)로 식탁에 도착한다. 조리 시간이 오래 걸리고 그에 비해 맛의 보상이 즉각적이지 않기에 자연스럽게 사람들의 식재료 선택지에서 밀려난 것이다. 그래서 미국에서 재배되고 유통되는 대부분의 대두는 기름 수율이 중요하거나 단백질 분리에 적합하거나 사료용으로 최적화되어 있다.
물론 한국 사람들도 대두를 조리해 먹기에는 시간이 많이 들고, 그 자체로 맛있다고 말하기 어렵다고들 한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이 불편함을 빨리 처리해버리는 대신, 대두를 아예 다른 음식으로 바꾸어 오래 두기로 선택했다. 그 선택은 바로 메주 쑤기였다. 이렇게 메주가 되어 발효의 시간을 거친 메주콩은 아미노산으로 분해되면서 감칠맛이 폭발적으로 증가하여 더 이상 ‘맛없는’ 식재료에 머무르지 않는다. 또한 공기와 계절,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의 몫을 남겨 두며 그 시간 속에서 된장과 간장으로 갈라질 준비를 한다.
장선용 선생님께 선물한 최기 목공예가의 메주틀이 메주틀로써의 역할을 처음 하던 날, 나는 그 자리에 함께하지 못했다. 그래서 메주틀에 찧은 메주콩이 담기는 순간이며 자연의 숨결을 품은 메주가 탄생하는 순간들을 직접 볼 순 없었다. 대신 장선용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사진으로 그날의 생생한 장면들을 전달받았다.
그리고 지난 대한과 입추 사이, 15일 띄운 뒤 햇볕에 말리는 중인 메주를 보러 장선용 선생님 댁에 다녀왔다. 메주를 만드는 순간은 놓쳤지만 메주가 시간을 통과하고 있는 순간 앞에 서 보니 여러 생각들이 밀려왔다.
같은 콩을 두고도 미국 문화는 단시간 안에 먹는 방법을 주로 발전시켰고, 한국 문화는 오랜 시간에 걸쳐 두는 법을 남겼다. 그렇기에 미국에서 메주를 담근다는 것은 우리가 어떤 시간을 식탁 위에 두고 싶은지 묻는 일이 아닐까 싶다. 먼훗날 ‘계절을 기다리고, 실패를 감수하고, 다음 해를 염두에 두는 시간’을 대하는 태도가 깃든 이민 생활 이야기를 스스로 발견할 수 있도록. 비록 그 발견이 빠르거나 즉각적이지 않다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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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 목공예가의 메주틀로 만든 장선용 선생님의 메주 레시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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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료: 메주콩 10되(40컵), 물 20되(80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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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드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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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가을에 수확한 햇콩을 골라 깨끗이 씻는다. 콩이 충분히 잠길 만큼 물을 붓고, 콩알 속까지 수분이 스며들도록 충분한 시간 동안 불린다. 불리는 동안 물 위로 떠오르는 콩은 건져내고, 반으로 갈랐을 때 속까지 고르게 불어 있는지 확인한다.
2. 불린 콩을 냄비에 담고 넉넉한 물을 더해 뚜껑을 덮은 뒤 센 불에서 끓이기 시작한다. 물이 끓기 시작하면 불을 줄여 콩이 손으로 눌렀을 때 쉽게 으깨질 정도가 될 때까지 오래 삶는다. 참고로 이 과정에서 콩물이 넘치려 하면 뚜껑을 열지 말고 뚜껑 위에 찬물을 흠뻑 적신 행주를 올려 온도를 식힌다. 이렇게 삶은 콩 색깔이 붉은색을 띄면 다 익은 것이다.
3. 충분히 익은 콩은 소쿠리에 건져 물기를 빼고, 열기가 남아 있을 때 절구나 도구를 사용해 알갱이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도록 거칠게 찧는다. 이때 콩의 질감이 살아 있는 것이 중요하다.
4. 메주틀 안에 보자기를 깔고 찧은 콩을 담아 손으로 눌러가며 단단하게 모양을 잡는다. 그다음 메주를 네모난 형태로 정리한 뒤, 서늘한 실온에서 며칠간 두어 겉면이 마르도록 한다.
5. 겉이 마른 메주는 햇볕에 바싹 말린 후 띄운다.
6. 한국에서는 메주를 띄우기 위해 볕짚에 꼬아 매다는데, 미국에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어 다음의 방법을 쓴다. 상자 안에 바싹 마른 메주를 한 켜 깔고, 그 위에 지푸라기를 한 켜 깔아가며 반복해서 쌓는다. 그다음 그 상자를 따뜻한 곳에서 15일 띄운다. 장선용 선생님은 집 안에서 따뜻한 곳을 마련하기 위해 파이어 플레이스에 밑불만 켜 놓고 그 위에 쿠킹팬을 놓고 박스를 놓는다.
7. 15일 띄운 메주를 다시 햇볕에 말린다. 오랜 시간 동안 자연스럽게 곰팡이가 자라도록 두며 속까지 충분히 마르게 한다.
8. 이른 봄이 되면 메주 표면에 곰팡이가 자리 잡고, 곳곳에 자연스러운 금이 생기면서 메주가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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