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윌셔에서] 내년에는 우리, 친정 가자

2026-02-12 (목) 12:00:00 성민희 소설·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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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고 동창 신년회를 했다. 세어보니 1980년에 결성된 이 모임이 어느덧 45년이라는 세월을 지나왔다. 처음 모임을 시작할 때, 지금은 팔십 대의 노년이 된 선배님들이 싱그러운 사십 대였으니 그때의 동창회가 얼마나 활기차고 풋풋했는지 돌아보면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해마다 봄이면 야유회를 하고, 가을이면 단풍을 찾아 여행을 떠나고. 연말이면 호텔 볼룸이 비좁도록 빙글빙글 춤을 추며 한 해를 마무리하던 화려한 시절이 있었는데. 여고시절의 높은 콧대를 하나도 꺾지 않은 자부심으로 후배 사랑을 아끼지 않던 대선배님들은 이제 모두 가시고 없다. 선배는 가고 후배는 들어오지 않아 숫자가 반으로 줄었기에, 변함없이 함께해 온 동창이 더욱 애틋하고 귀하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그 위로 겹쳐지는 추억이 있으니 사람 사이에서 생겨난 역사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를 새삼 깨닫는다.

어느 봄 야유회에서 있었던 유쾌한 소동이 생각난다. 동창인 부인 없이 혼자 나타난 남편분을 보고 우리는 깜짝 놀라 물었다. “형부, 언니는 어디 가고 혼자 오셨어요?” 그러자 쑥스러운 기색 하나 없이 손까지 내저으며 대답하셨다. “아, 우리 집사람. 오늘 생리 중이라꼬~”


우리를 배꼽 잡고 웃게 했던 그 위트 넘치던 ‘형부’도 이제는 80대 노인이 되셨다.

이번 신년회에서는 특히 마음을 울리는 시간이 있었다. 한 언니가 조용히 마이크를 달라더니 두툼한 노트 몇 권을 들고나왔다. 정성스럽게 포장된 Gucci 브로치도 선물로 내놓았다. 그것은 한때 형편이 어려웠던 시절, 얼마 동안 생활비를 대어주었던 동기들과 이런저런 모양으로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준 동창들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었다. 언니가 보여준 노트는 받은 사랑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록해 둔 ‘은혜의 장부’였다. 엘리야에게 음식을 물어다 준 까마귀처럼, 끊이지 않았던 동창의 사랑이 있었기에 그 모진 세월을 견딜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이제 환경은 부유하게 바뀌었지만, 그때 받은 사랑의 순간만큼은 변하지 않고 마음속에서 빛나고 있다는 언니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사람 사이에서 많은 일을 만들어 낸다. 때로는 남의 몸에 상처를 내기도 하고,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물질로 손해를 입히기도 한다. 그중에서도 가장 나쁘고 아픈 일은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다. 눈에 보이는 흉터는 시간이 흐르며 옅어진다. 설령 남아 있더라도 다쳤을 당시에 느꼈던 그 날카로운 통증까지 고스란히 재현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는 곰곰 되새길수록 골은 더 깊어지고 선명해지는 경우도 있다. 그와는 반대로, 마음으로 입은 은혜 또한 물질로 받은 도움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깊은 흔적을 남긴다. 고난의 시기에 건네받은 따뜻한 눈빛과 정성 어린 말 한마디는 영혼에까지 각인되는 감동이 된다는 사실을 보며 우리는 모두 마음이 뜨거워졌다.

돌아보면 동창들과 함께한 45년의 세월은 좋은 기억을 심고 가꾸어 온 시간이었다. 상처보다 위로를, 시기보다 격려를 나누며 서로의 세월을 지켜 준 우리의 관계는 세월이 갈수록 더욱 영롱한 보석이 되었다. 내년은 모교 100주년이 되는 해다. 친정이 모두 사라지고 없는 노년의 졸업생들은 서로 속삭인다. “내년에는 우리, 친정에 가자.”

<성민희 소설·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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