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바탕 비가 지나가고 나니 뒷마당의 공기가 달라졌다. 바람도 부드럽고 구름도 평온하다. 오늘은 풀장 옆 작은 꽃밭에 노란 프리지아가 싹을 피웠다. 겨우내 땅 속에서 숨을 죽이다가 봄만 되면 어김없이 피어나는 천진난만한 꽃. 여린 줄기가 흙을 헤집으며 봄볕을 가만히 잡고 올라왔다. 꽃잎에 맺힌 투명한 물방울에 햇살이 스며든다. 따스한 봄바람이 한 겹 한 겹 접어올린 듯 얇고 섬세한 꽃잎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엄마 생각이 난다.
어느 해 봄, 엄마는 프리지아 화분 두 개를 들고 오셨다. 친구 병문안 가면서 샀는데 너무 예뻐서 두 개를 더 샀다고 하셨다. 옷을 훌렁 벗어던지고 고쟁이 바람으로 웅크리고 앉아 뿌리 위로 흙을 덮고 두 손바닥을 펼쳐 꼭꼭 누르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프리지아를 심은 그 해 가을, 엄마의 친구는 양로병원 침대에서 돌아가셨다. 슬픔이 공기처럼 떠돌던 장례식장에서는 손수건으로 입을 꾹 누른 채 울음을 삼키던 엄마가, 이듬해 봄에 핀 노란꽃을 보며 눈물을 흘리셨다.
“꽃은 이래 폈는데 니는 어데로 갔기에 한번도 안 오노?” 엄마는 꽃을 쓰다듬고 또 쓰다듬었다. 양로병원 침대 머리맡을 지키던 그 화분을 다시 만난 듯.
엄마 떠나신 지도 벌써 4년이 되었다. 이제는 내가 쪼그리고 앉아 꽃을 들여다본다. 올해도 프리지아 향기는 어김없이 날아드는데 엄마는 왜 오시지 않는 걸까. 엄마가 꽃보다 훨씬 귀하고 튼튼한데... 대답 없는 질문을 던지며 뜰에 고인 정적을 마주한다.
프리지아를 그때는 여섯 송이쯤 심은 것 같았는데 해가 갈수록 뿌리는 더 넓게 번져 올해는 파란 풀장 옆을 가득 채웠다. 옛날에는 해마다 제 자리를 찾아오는 저 꽃들이 당연한 순리라고 별 관심도 없었는데. 엄마가 가신 뒤에야 나는 자연의 시계와 인간의 시계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음을 새삼 느낀다. 꽃은 땅으로 돌아가 다시 태어날 ‘가능성’이 되지만, 사람은 돌아가는 순간 ‘완전한 부재’가 되어버린다는 것. 인간의 삶은 되감기가 불가능한 단 한 번의 비가역(非可逆)적 선이라는 것. 단 한 번의 흐름으로, 딛는 족족 조용히 닫힌다는 것을. 결국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므로 찰나를 간절히 살아내고, 끝이 있음을 알기에 지나간 사랑과 슬픔마저 소중한 것일까.
어릴 때는 이별이라는 단어가 그리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그저 수많은 낱말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흘러가면 되돌아올 수 없는 강물처럼 시간도 삶도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영별(永別)이란 사라짐이 아니라 살아남은 사람에게 남겨진 깊은 그리움과 상실의 또 다른 이름인 것을. 어쩌면 오늘 내가 프리지아를 바라보는 것도 위로의 한 방식인지 모른다.
뜰에 주저앉아 흙을 꾹꾹 누른다. 엄마의 손길이 머물던 그 자리다. “이래 눌리야 뿌리가 안 흔들린다 아이가” 투박한 사투리. 이제는 만질 수 없는 손등, 비록 엄마는 돌아오지 않지만 그 온기는 아직도 가슴 속에 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 위에서 나는 내게 허락된 이 찰나의 봄을 정성껏 다독이며 엄마, 하고 불러본다.
<
성민희 소설·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