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4년 제작된‘번암집’ 책판. 1970년대 골동품 가게에서 금칠도 하고 장식용 고리도 달아 상품으로 판매되면서 국가유산이 해외로 반출됐다.

왼쪽부터‘번암집’ 책판을 기증한 김미현·은혜 자매와 허민 국가유산청장,‘척암선생문집·송자대전’ 책판 기증 대리인 에런 팔라.
버지니아의 한 가정집 식탁 옆에 걸려있던 목판이 조선 후기 문화유산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 목판의 미국인 주인은 3년여전 집을 정리하면서 한국 골동품 가게에서 구입했던 것을 기억해 페어팩스의 한인 이웃 김은혜 씨에게 선물했다. 1970년대 한국에서 근무했던 미국인들은 귀국을 앞두고 이러한 골동품을 구입해 지인들에게 선물하곤 했었다.
김은혜 씨의 동생 김미현 씨(민족문제연구소 워싱턴지부 실장)는 이 목판의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 본보에 문의했고,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 미국사무소(소장 강임산)를 통해 조선 후기에 제작된 ‘번암집’ 책판(1824년 제작)인 것으로 확인됐다. ‘번암집’은 정조 시대 우의정을 지낸 번암 채제공(1720~1799)의 문집으로 전체 1,159점 가운데 358점만 현존하고 있으며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김 씨는 이러한 사실을 확인시켜준 미국사무소 측의 기증 제안을 받아들여 지난 8일 대한제국공사관에서 워싱턴을 방문 중인 허민 국가유산청장에게 전달했다.
국가유산청은 “한국에서 도난 또는 분실된 책판 일부가 기념품으로 둔갑해 해외로 반출됐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라며 “이와 비슷한 경로로 반출된 문화유산이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조사를 진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강임산 소장은 “워싱턴 인근 버지니아와 메릴랜드에는 전·현직 연방공무원이 다수 거주하고 있고, 한국에서 근무했던 사람들도 많아 아직 드러나지 않은 한국의 유물이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면서 “한국 문화유산의 의미와 가치를 알리는 기증 캠페인을 전개할 계획이며 한인들의 관심과 참여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한편 국가유산청은 이날 ‘척암선생문집’ 책판(1917년)과 ‘송자대전’ 책판(1926년) 등 다른 2점의 책판도 기증받았다. ‘척암선생문집’은 을미의병(1895년) 당시 안동지역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김도화(1825~1912)의 문집으로 당초 1,000여점이 있었으나 2015년 ‘한국의 유교책판’으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19점이 일괄 등재됐다.
‘송자대전’은 조선 후기 유학자 우암 송시열(1607~1689)의 문집과 연보 등을 모아 만든 것으로 1787년 첫 간행됐다. 1907년 일본군에 의해 책판이 전량 소실되었다가 1926년 송시열의 후손과 유림들이 복각했다.
이 책판은 1970년대 국제개발처(USAID) 한국지부에서 근무했던 앨런 고든(Alan Gordon, 1933~2011)씨가 한국 골동품 가게에서 구입해 미국에 가져온 것이다. ‘척암선생문집’ 책판은 그의 부인이 보관하고 있었으며 ‘송자대전’ 책판은 웨스트버지니아에 거주하고 있는 그의 여동생이 보관하고 있다가 이번에 기증했다.
국외소재문화유산재단에 따르면 2012년 7월 설립 이후 해외 문화유산 환수 사례는 1,299건(2,855점)으로, 이 가운데 96.2%(1,249건)가 기증을 통해 환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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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제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