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망보험 김성준·이경란 대표
▶ 신앙·성실·책임으로 일군 50년 보험인의 길

파티장에서 함께 한 김성준, 이경란 부부
▶메트 라이프에서 10년 경험쌓은후 1982년 희망보험 창립
▶“고객에 필요한 것 우선”윤리강령 평생 영업철학으로
▶두 아들 합류 후 타민족 시장 진출 매출 급성장
1947년 전남 광주 임동 100번지. 배우 윤정희와 같은 동네에서 태어난 김성준(세례명 모세) 대표는 김수로왕 후손으로, 김해 김씨 집안의 3남 4녀 중 막내였다. 그의 선산이 있는 곳은 나주 동강면. 6살 때, 6·25 전쟁 중 부친을 잃고 어머니 슬하에서 누나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란 덕에 그는 어린 시절 결핍을 몰랐다.
광주 수창초와 북중을 거쳐 서울고교에 진학한 그는 태권도 유단자가 될 만큼 성실했고,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프랑스어와 정치외교학을 공부하며 넓은 세계를 향한 꿈을 키웠다. 이 시절의 경험은 훗날 미국 이민 후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데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2004년, 김수환 추기경이 한국 최초 추기경이 되자마자 로마에서 한국으로 귀국하는 길에 뉴욕 맨하탄 한인성당 방문시 퀸즈성당 교우들과 김 추기경을 알현하고 있는 김성준, 이경란 부부.
■월남전에서 전쟁의 현실 경험
1968년 육군 31사단에 입대한 그는 맹호부대포병대대 소속으로 월남전에 파병(1969-1971)되었다. 월남전 참전은 죽음을 무릅쓴 젊은 시절의 자발적 모험이었는데, 보이지 않는(하느님) 손길이 위험으로부터 보호해주었다고 한다.
그는 사이공 월남어 교육대에서 언어를 익힌 뒤 주월사령부 부관참모부에서 근무하며 전쟁의 현실을 온몸으로 겪었다. 그는 “전쟁은 인간의 나약함과 강인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현장이었다”고 회고한다.
■가정중심의 원동력 된 가톨릭 신앙
고교 1학년 성탄절 때 아현성당에서 영세를 받고 가톨릭 신자가 되고 오랜 교회생활과 성서 공부를 통해 가족을 지키는 가장의 책임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 그것은 훗날 신앙인으로서 살아가야 할 방향과 가정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었다.
■대한항공 승무원에서 미국 이민, 그리고 희망보험의 탄생
외대를 졸업하고 대한항공 객실 승무원으로 근무하던 그는 1976년 아내 이경란(세례명 아가다)과 결혼한 뒤 미국으로 이민했다. Met Life에서 10년간 세일즈맨으로 일하며 보험의 본질을 배웠고, 1982년 마침내 희망보험(Hope Agency Inc.)을 창업했다.
그는 “보험인은 자신의 커미션을 생각하는 것 대신에 고객이 필요로 하는 것을 먼저 권해야 한다”는 윤리강령을 평생의 원칙으로 삼았다. 이 원칙은 단순한 영업 철학이 아니라, 그의 신앙과 삶의 태도에서 비롯된 가치였다.
그는 고객을 ‘계약의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 대했고, 그 진심은 고객들에게 깊은 신뢰로 쌓여갔다.
그는 대뉴욕지구보험재정협회 창립(1995) 맴버-2대 회장을 역임(1997-1999)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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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평화통일 운동에 헌신한 신앙인
김 대표의 삶은 사업가의 길에만 머물지 않았다. 1980년대 군부독재 반대와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에 참여했고, 1989년에는 남북 이산가족 찾기 운동으로 북한을 방문하기도 했다.
1990년부터 10년간 미주 가톨릭 정의평화위원회 총무로 활동하며 “정의가 실현되어야 평화가 온다”는 신념을 실천했다. 그는 함세웅 신부, 황창연 신부, 유흥식 라자로 추기경 등 존경하는 성직자들의 가르침을 삶의 지침으로 삼아왔다.
그에게 신앙은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나침반이었다.
2008년에는 ‘뉴욕민주평통 12기 시무식’에 전 주한 미 대사 James R. Lilley를 초청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부부가 함께 일군 희망보험, 그리고 아내의 적극적인 내조와 활동, 리더십
아내 이경란 여사는 1985년 희망보험에 합류해 1997년 브로커 라이센스를 취득했고, 2013- 2015년에는 보험재정협회 10대 회장으로 그 당시 최초의 여성 회장으로 선출됐다.
그는 사교적이고 따뜻한 성품으로 고객과 지인, 주위에 신뢰를 쌓았고, 은퇴 후에도 단우회, Big Apple 등 다양한 활동을 통해 보람된 사회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부부는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며 40년 넘게 희망보험을 함께 성장시켜 왔다. 때로는 의견 차이로 갈등과 마찰도 있었지만, 그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가정을 지키는 가장의 책임과 위치를 잃지 않으려 노력했다”고 말한다. 그들의 동행은 단순한 부부의 협업이 아니라, 서로의 인생을 지탱해주는 든든한 동반자 관계였다.
■골프·등산·독서·사색으로 채우는 은퇴 후의 시간
은퇴 후 그는 새벽 독서와 성경 읽기, 아침 설거지와 요리, 동네 산책 6000~7000보, 손자 픽업 등 규칙적인 일상 속에서 사색과 기도를 이어가고 있다.
독학으로 배운 골프는 그의 인생철학을 닦아준 운동이었고, 한때는 골프를 내려놓고 10년간 뉴욕 업스테이트 캣츠킬의 3000피트 산들을 오르며 등산에 몰두하기도 했다.
그는 “골프는 인생을 비춰주는 거울”이라는 생각으로 늘 상대에게 관대하고 자신에게 엄격한 태도를 지켜왔다고 한다. 은퇴 후의 시간은 그에게 또 다른 배움의 시기이며, 감사의 시기이다.
■신앙으로 마무리하는 하루, 감사로 채우는 인생
주변 지인들이 하나둘 세상을 떠나는 나이가 되었지만 그는 성경 말씀을 마음에 새긴다. “항상 깨어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라.” 그는 오늘도 그 말씀을 따라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고, 그러나 몸과 정신은 단단하게 여미고 하루를 살아간다.
그리고 뒤에서 두 아들이 회사를 안정적으로 이어가도록 후견인으로 조용히 뒤에서 도우면서 또 하나의 결실을 보고 있다. 그의 삶은 이민자로서 성실하게 살아온 한 개인의 스토리는 물론, 가정·신앙·성실이 만들어낸 한 세대의 역사이기도 하다.
김성준 대표의 개인 블로그 http://forrainyday.tistor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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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보험의 2세 시대, 매출 3배 성장의 기적
■ ‘뿌리·신앙·가정교육’ 세 아들 교육 가치로 삼아
김성준 대표는 세 아들 Julius, William, Lawrence를 키우며 뿌리교육·신앙교육·가정교육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았다. 여름 캠핑, 해수욕장, 겨울 스키 등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다니기 꺼리는 고등학교 시절까지도 가족 중심의 삶을 지켜내려고 애썼다.
그는 “부친이 일찍 작고한 탓에 아버지 없이 자라 자식들에게만큼은 편안하고 안정된 가정을 만들어주고 싶었다”고 말한다. 그의 가정은 늘 따뜻했고, 신앙은 그 중심을 지탱하는 기둥이었다.
큰 아들 Julius(2008 입사), 둘째 William(2011 입사)은 부모 세대가 쌓아온 신뢰와 전문성을 이어받아 희망보험의 2세 시대를 열었다. 특히 타민족 고객층으로의 확장은 매출을 부모 세대 대비 3배 이상 성장시키는 성과로 이어졌다.
두 아들이 투입된 것은 김 대표의 계획과 설득의 결과였다. 대학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는 두 아들의 상황을 보니 안 되겠다 싶었다고 한다. 그래서 더 나은 수입을 약속해주겠다고 타이르며 큰 아들, 작은 아들 순으로 데려오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셋째 아들 Lawrence는 현재 미 해군에서 복무중이며 또 다른 길에서 가족의 명예를 이어가고 있다.
김 대표는 “적토성산, 유지경성, 가화만사성”이라는 말처럼, 작은 성실이 쌓여 큰 결실이 되고, 화목한 가정이 모든 성공의 근본이 된다고 믿어 그대로 실천하기 위해 나름 최선을 다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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