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은퇴는 끝이 아니라 또 하나의 출발선

2026-01-01 (목) 07:31:59 이창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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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의 삶 사는 사람들

은퇴는 많은 이들에게 ‘쉼’이나 ‘물러남’을 의미한다. 그러나 클라라 하 씨와 이창재 씨에게는 은퇴는 멈춤이 아니라 또 하나의 출발이었다. 한 사람은 52세에 사업을 내려놓고 예술과 배움의 길로 들어서고, 또 한 사람은 마라톤과 음악, 자연 속으로 달려나갔다. 나이는 달라도 두 사람의 삶이 전하는 메시지는 하나다. 은퇴 이후의 시간은 남은 인생이 아니라, 새로 시작되는 인생이라는 것이다. 두 사람을 통해 은퇴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한다.

은퇴는 끝이 아니라 또 하나의 출발선

은퇴 이듬해인 2025년 10월, 워싱턴 DC에서 열린‘아미 10마일(Army Ten-Miler)’ 대회에 참가해 완주하고 있는 이창재 씨.


77세에 은퇴한‘영원한 편집인’이창재 씨
“은퇴 후 몸도 마음도 더 바쁘다”
마라톤·스쿠버 다이빙·오션 카약·등산까지

이창재 씨(78세, 센터빌 VA)는 은퇴 이후에도 하루가 모자란다. 77세가 되던 2024년, 그는 미 국영방송인 중동 방송 네트워크(Middle East Broadcast Network, MBN) 다큐멘터리 제작국에서 편집인(Editor)으로 오랜 방송 생활을 마무리했다. 영화와 다큐멘터리 제작, 촬영감독, 편집 등으로 40년간 방송 현장을 지켜왔지만, 은퇴는 그의 삶을 느리게 만들지 않았다. 오히려 더 바쁘고, 더 역동적인 시간이 시작됐다.

이 씨는 은퇴 이듬해인 2025년도 10월, 워싱턴 DC에서 열린 ‘아미 10마일(Army Ten-Miler)’ 대회에 참가해 완주했다. 그는 이 대회에 2009년부터 매년 출전해왔으며, 회갑을 기념해 뉴욕 마라톤, 고희를 기념해 미 해병대 마라톤을 완주했다. 80세가 되는 2027년에는 시카고 마라톤이나 해병대 마라톤에 도전할 계획이다.


그는 “아직 내가 살아 있고, 움직이고 있다는 걸 스스로에게 증명하고 싶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8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도전한 10마일 완주는 그의 삶을 상징하는 장면이다.
은퇴 전부터 즐겨온 마라톤, 스쿠버 다이빙, 오션 카약과 등산은 여전히 그의 일상이다. 주변에서는 “시니어라고 믿기 힘들 정도로 활동적”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는 체력의 비결로 한국과 미국에서의 군 생활을 꼽는다. 그는 “한국에서 3년, 미국에서 6년간 군 생활을 했다”면서 “미국에서는 미 육군 야전 공병으로 버지니아 뉴폿뉴스에서 수중용접(Underwater Welding)을 했다”고 말했다.

운동만이 전부는 아니다. 이 씨는 드럼과 미술에도 깊이 빠져 있다. 수채화와 유화를 즐기며, 취미 수준을 넘어선 실력을 갖췄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지인들이 이사를 하면 새 집 앞에 직접 찾아가 사진을 찍고, 이를 바탕으로 그림을 그려 선물하는 것이 그의 작은 기쁨이다. 이 씨는 “집그림을 그려서 선물했는데, 다들 정말 좋아하더라”며 웃었다.

음악 활동도 활발하다. 그는 한인 밴드 ‘좋은 친구들’에서 드러머로 활동 중이다. 밴드는 주 1회 정기 연습을 이어가고 있으며, 연말연시가 되면 각종 행사와 모임에서 연주 요청이 잇따라 이 씨의 일정도 덩달아 바빠진다.

마라톤에 대한 열정도 역시 식지 않았다. 풀 마라톤을 수차례 완주한 그는 매주 토요일 버지니아 버크레이크 파크를 찾아 워싱턴한인마라톤클럽 회원들과 함께 호수 둘레를 달린다. 현재 클럽 회원 가운데 최고령자이다. 주중에는 매나세스의 배틀필드(Battlefield)에서 약 5마일을 걷고 뛰며 체력을 다진다.

이씨는 “은퇴는 일을 그만두는 것이지, 삶을 멈추는 건 아니다”라며 “카메라 뒤에서 세상을 기록해왔던 것처럼, 이제는 내 몸과 일상을 통해 인생의 다음 장면을 만들어 가고 있다”고 말했다.

77세에 은퇴했지만, 그의 인생은 여전히 촬영 중이다. 렌즈는 내려놓았어도, 이창재 씨의 삶은 지금도 가장 생생한 다큐멘터리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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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는 끝이 아니라 또 하나의 출발선

2025년 12월, 인근의 센터빌 소재 라이프타임 피트니스 센터에서 근력운동을 하고 있는 클라라 하 씨.


52세에 은퇴, 20년째‘인생의 황금기’사는 클라라 하 씨
“은퇴 빨리 한 게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
72세에도 피클볼·탁구·근력운동·수영까지

클라라 하(72·센터빌 VA) 씨는 52세라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사업 일선에서 물러나 은퇴했다. 그는 이후의 삶을 ‘쉬는 시간’이 아니라 ‘새로 배우고 도전하는 시간’으로 채워왔다. 클라라 하 씨는 “은퇴를 빨리 한 것이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선택”이라고 말한다.

하 씨는 과거 뷰티 서플라이 사업을 운영하며 성공적인 사업가로 활동했다. 미국 이민 40년 차인 그는 펜실베이니아주 해리스버그에서 비즈니스를 하며 바쁜 사업가의 삶을 살았다. 그러다가 자식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만큼 된 듯하여 비즈니스를 접었다. 52세가 좀 이른 듯 했지만 무엇이 중요한지에 무게를 두고 은퇴를 했다고 한다.

은퇴 이후의 삶은 정적인 휴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 씨의 하루는 여전히 활동적이다.
매주 토요일 피클볼과 탁구, 매주 일요일에는 C&O 운하 트레일에서 4마일 걷기가 일과처럼 이어진다. 월요일과 목요일에는 집 근처 라이프타임 피트니스 센터에서 근력 트레이닝을 받는다. 그는 라이프타임 피트니스에서 근력 운동과 수영을 꾸준히 병행하고 있다.

배움에 대한 열정도 식지 않았다. 은퇴 직후 한국으로 건너가 단국대학교에서 1년간 도예를 공부했고, 이후 59세에 워싱턴 DC의 코코란 예술대학(Corcoran School of the Arts & Design) 3년 과정을 수료했다. 도예와 미술을 본격적으로 공부한 그는 작품 활동을 이어가며 도예 개인전도 열었다.

63세에는 색소폰에 도전했다. 악기를 배우는 데 나이는 장애가 되지 않았다. 그는 연주를 넘어 색소폰을 가르치고, 무대에서 연주하며, 그림 작업도 병행하고 있다. 70세가 되던 2023년에는 버지니아 알렉산드리아 소재 워싱턴한인커뮤니티센터에서 색소폰 독주회를 갖고 색소폰 모음집 CD와 USB 후원금으로 받은 2,050달러를 당시 워싱턴6.25참전유공자회에 전달하기도 했다. 당시 연주회에는 하 씨가 만든 도자기 작품과 그림들이 전시되기도 했다.

또한 2024년에는 시집 ‘나는 어디에 있어야 나그네가 아닐까’를 출간하기도 했다. 지난 2년간 중앙시니어센터에서 색소폰과 그림(Botanical Pen Drawing)을 가르쳤으며, 앞으로는 성당과 지역 커뮤니티 등으로 활동 무대를 넓힐 계획이다.

하 씨는 “은퇴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며 “돈을 버는 인생에서, 나를 키우는 인생으로 넘어간 순간이었다”고 말한다. 사업으로 치열하게 살았던 전반부의 인생과 달리, 은퇴 후의 삶은 몸과 마음, 그리고 예술을 함께 단련하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그의 삶은 ‘언제 은퇴하느냐’보다 ‘은퇴 후 무엇을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52세에 은퇴해 20년째를 맞은 지금도, 클라라 하 씨의 인생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창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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