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트럼프의 새 독트린 “미국을 다시 왜소하게”

2025-12-24 (수) 12:00:00 파리드 자카리아 /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 CNN ‘GPS’ 호스트
크게 작게
트럼프 행정부의 새로운 국가안보전략(NSS)에 붙일만한 맞춤한 슬로건이 있다면 그것은 “미국을 다시 지역 강국으로”일 것이다. 이 문서는 지난 수 십년간 글로벌 패권국으로 전세계에 걸쳐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고, 세계화를 촉진하며, 국제기구를 포용하고, 지구촌의 부담을 떠맡아온 미국의 외교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NSS는 미국이 국익을 훨씬 더 협소하게 정의해야 한다고 말한다. 유럽과 아시아에도 약간의 국익이 걸려있다고 인정하면서도 미국의 근본적인 이익은 이웃인 서반구에 있다고 주장하며 이곳에 먼로 독트린과 - 테디 루즈벨트가 선언했던 루즈벨트 콜러레리와 대단히 유사한 - ‘트럼프 콜로레리’를 들먹인다. 여기서 말하는 트럼프 콜러레리란 고립주의를 골자로 한 먼로주의의 확장을 뜻한다. 마르코 루비오 국무장관은 최근 ‘미국 우선주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에 일차적인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이 모두가 논리적인 듯 들리지만 그렇지 않다. 미국은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가이고, 그 영향력은 지난 30년간 미국의 기업들과 첨단기술이 실질적으로 세계를 지배하면서 커졌다. 미국은 스스로를 자신의 뒷마당에 가두어 두어선 안된다. 이렇게 되면 미국은 물론 세계 전체에 엄청난 파장을 드리우게 된다.


우선 제임스 먼로 대통령이 자신의 이름을 딴 독트린을 발표했던 1823년 무렵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당시 미국은 대부분 미시시피강 동쪽에 위치한 24개 주와 1,000만 명의 인구로 구성된 조그만 공화국이자 농업국가였다. 글로벌 GDP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은 고작 2.6%로 지금의 십분의 일에 불과했고, 병력 규모가 세계 15위권에 들지못할 정도로 군사력 역시 보잘 것 없었다.

먼로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제국의 압제에서 벗어난 여러 중남미 국가들의 독립을 인정했고, 유럽 강대국들을 향해 이들을 다시 식민지화하기 위해 개입해선 안된다고 경고했다. 다시말해 그는 반식민주의와 불간섭주의 원칙을 주창했다.

오늘날 전세계에 걸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초강대국 미국의 활동반경을 먼로 시대의 관점에 맞춰 제한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미국의 뒷마당을 우선시하는 외교전략은 워싱턴이 세계에서 경제적 중요도가 가장 낮은 지역중 하나에 집중하게끔 만든다. 멕시코를 제외한 나머지 중남미 전체 국가들과 미국의 무역액은 2024년 기준으로 대략 4,500억 달러 정도였다. 반면 같은 기간 유럽연합(EU)과의 교역액은 이보다 세 배나 많은 1조 5,000억 달러였고, 아시아와의 교역량은 2조 달러를 웃돌았다. (미국과 캐나다, 멕시코와의 교역량도 상당한 규모이긴 하지만 이들 3개국은 경제적으로 너무도 긴밀히 얽혀있어 어떤 면에서는 단일한 북미경제권으로 간주된다.)

냉전시대의 억제전략을 만들 당시, 외교관이었던 조지 케난은 미국, 영국, 독일과 서유럽, 소련과 일본 등 세계에는 다섯 개의 경제 중심국이 있다고 주장했다. 케난은 소련의 영향권에 속하지 않은 세 개의 경제 중심국이 반드시 워싱턴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요즘에는 이 목록에 중국을 추가하고, 영국과 독일을 유럽 전체로 묶는 등 약간이 수정이 필요하겠지만 주요 경제국들과의 우호적인 관계 유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기본 전략은 동일할 것이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트럼프의 국가안보전략은 미국을 글로벌 경제의 주변부에 묶어둔다.

여기서 한가지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NSS는 여러 명의 다른 작가들이 부문별로 작성한 글을 짜깁기 해놓은 일관성이 결여된 문서다. 이 문서는 자체적으로 모순되는 내용이 자주 등장할 뿐 아니라 진부하기 짝이 없다. “트럼프 대통령의 외교정책은 실용적이지 않으면서 실용적이고, 현실적이지 않으면서 현실적이며, 이상적이 아니지만 원칙적이고, 매파적이지 않으면서 강력하며, 온건하지 않으면서 절제되어 있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보다 적극적으로 국제적인 역할을 수행하려는 듯 들리는 대목도 더러 등장하지만 필자가 언급한 것이 NSS의 주된 기조다.

트럼프 행정부의 국가안보전략은 유럽 문제에 개입하지 않고 이민을 단속한다는 1920년대와 1930년대의 고립주의 대외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실제로 지금처럼 그 때에도 세계 문제 개입에 대한 미국의 회의론은 반이민주의 정서와 손을 맞잡고 있었다. 외국인들이 미국사회에 동화할 수 없을 것으로 우려했던 토착주의자들은 방대한 이민제한법을 시행했다. 당시 그들은 아일랜드인, 남유럽인과 유대인 등이 동화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그들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트럼프의 NSS는 이민이 국가안보를 위협한다는 고착된 사고에 사로잡혀 있으며 ‘문명의 소멸’을 가져올 수 있는 자국과 유럽으로의 이민이 오늘날 미국이 직면한 가장 중대한 위협이라는 주장과 맞닿아 있다.

오늘날의 국제 상황은 1920년대와 상당히 흡사하다. 미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국제 시스템을 안정적으로 유지할 역량을 지닌 국가다. 미국이 뒷전으로 물러서면 힘의 공백이 생기고, 책임감이 부족한 강대국들이 빈 자리를 채울 것이다. 한 세기 전 미국이 마땅히 져야 할 책임을 회피하자 국제 체제가 붕괴하면서 세계2차대전으로 이어졌다. 오늘날, 세계에는 여러 다른 안정화 세력이 존재하지만 미국이 자신의 뒷마당만 돌보려 한다면 세계는 방향타를 잃은 채 불안정과 혼란으로 빠져들 것이다. 우리가 역사의 쓰린 교훈을 다시 배워야만 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파리드 자카리아 / 워싱턴포스트 칼럼니스트 / CNN ‘GPS’ 호스트>

카테고리 최신기사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