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은 계절 틈에 서 있는 달이다. 한여름의 뜨거움도, 한겨울의 매서움도 없다. 한 문장이 끝나고 다음 문장이 시작되는 사이에 숨어 있는 말이 있듯이, 계절의 끝자락을 스치는 이 시절을 나는 글의 줄 사이 ‘행간 같은 달’이라 부른다.
불같은 태양의 열기는 사그라졌지만 품을 파고드는 찬 바람으로 기세를 떨치지는 않는다. 아침엔 싸늘한 기운에 두꺼운 옷을 챙겨도 한낮이 되면 전혀 다른 날씨가 되어 옷을 맞춰 입기가 난감하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문턱 같은 달이라 계절의 색이 없다. 울긋불긋했던 단풍의 원색은 사라지고 하얀 겨울눈은 아직 내리지 않는다. 비라도 한차례 오고 나면 젖은 나뭇잎들은 그나마 가지고 있던 가을 색을 잃어버린다. 꽃도 잎도 다 떠난 자리에 서늘해진 바람이 돌아도 한자락 따스한 햇볕은 남아있다. 나뭇잎을 떨어낸 나무들처럼 마음을 비워내 본다.
창가에 머물던 햇볕이 며칠 사이 방안 깊숙이 들어왔다. 햇살은 낮게 비추고 그림자는 길게 드리운다. 계절과 상관없이 새순을 내고 있는 스투키 선인장 화분을 햇볕이 잘 드는 쪽으로 옮겨 놓았다. 한 줌의 햇빛이라도 살뜰히 모아 잘 자라거라 말해주었다.
볕 바른 창가에 앉아 책을 읽었다. 등이 곧 따스해졌다. 글 사이 뜻까지 음미하며 천천히 읽었다. 활자로 쓰여있는 낱말보다 더 깊은 의미를 지닌 행간에서는 잠시 머물기도 했다. 그럴 때면 작가가 차마 쓰지 못한 이야기와 진정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옆에서 조곤조곤 말해주는 듯하다. 나는 까뮈 작품을 읽을 때 종종 그가 곁에 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와 나의 마음이 맞닿는 곳에 감탄하면서 밑줄을 긋는다.
행간이 없는 문장은 윤기가 없듯이 가을과 겨울 사이에 쉼을 찍어주는 어중간한 이 계절이 없다면 한 해를 보내기가 너무 벅차고 아쉬울 것 같다. 쫓기듯 흘러가는 세월에 잠시 멈추어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다음 해를 준비할 여유를 주는 여백 같은 달이다.
11월이 오면 마음이 바쁘던 시절이 있었다. 대학입시를 앞둔 11월은 불안하고 초조한 날의 연속이었다. 한국 날씨는 이미 겨울에 접어든 계절이다. 입시 날은 해마다 유별나게 추웠다. 호기롭게 신춘문예에 도전했던 젊은 시절 어느 가을은 조급하기만 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일 년 내내 머릿속에서 맴돌던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11월 30일까지 신문사로 보내야 하는 글의 막바지 퇴고를 하고 원고지에 옮기느라 정신없이 지내는 날들이었다.
낭만도 사라지고 꿈도 바뀐 생활인이 되어서는 크리스마스를 앞둔 가게의 분주함 속에 하루를 흘려보냈다. 크리스마스 물건 주문은 여름부터 시작되지만 11월이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어떤 물건을 얼마나 마련해야 할지 해마다 점쳐 보아도 꼭 들어맞지는 않아 마치 개봉박두를 기다리는 심정이었다. 어느 해는 장식품이 모자라기도 하고 어느 물건은 그대로 남아 낭패를 보기도 했다.
입시도, 신춘문예도, 생활인의 삶도 결과를 알 수 없어 기다림 만이 있는 11월이었다. 끝까지 간 것은 아니지만 처음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무 멀리 와버린 날들이다. 그래서 남은 순간들은 천천히 머물다 가면 좋겠다고 지나온 시간을 아쉬워한다. 올해는 유난히 세월이 빠르다고 넋두리하면서.
시간이 당겨진 듯 일찌감치 장식된 크리스마스트리 앞에서 기억의 흔적을 잡으려 같은 자리를 맴돌며 서성인다. 벌써 그리움이 그림자처럼 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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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실 수필가>